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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가을 들엔 종이 한 장의 고요가 있다”

등록 2011-04-01 20:48

사진 민음사 제공.
사진 민음사 제공.
‘종이 소재’ 미발표 시 76편 묶어
시인 특유의 따뜻한 시선 녹아
<종이>
신달자 지음/민음사·8000원

중견 시인 신달자(68)의 <종이>는 제목처럼 온전히 종이에 바쳐진 시집이다. 7년 전부터 써 온 시 100여 편 가운데서 76편을 추려 묶었다. 문예지 등에는 한 번도 발표하지 않은, 말 그대로의 신작들이다.

“따뜻함, 영원함, 영성적 노동, 가득함, 화합, 평화, 사랑, 모성, 순수, 고향, 우직함, 이런 충돌 없이 잘 섞이는 감정의 물질들을 하나의 원소로 종합한 것을 ‘종이’로 표현하고 싶었다.”

책 머리 ‘시인의 말’은 이 시집의 기조를 잘 말해 준다. 시인은 종이의 역사와 쓰임, 상징성 등을 두루 시로 노래하는 한편, 세상 만물에서 ‘종이스러운’ 미덕을 찾아낸다.

“겨울 지하 통로에 누워/ 종이 한 장으로 세상의 바람을 가리고 있는/ 종이 한 장으로 지나온 세월을 덮고 있는/ 관심사에 멀어진 의문의 흐릿한 기호 하나”(<종이 이불> 부분)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하고 다시 삼천 번을 심고 추수한 후의/ 가을 들을 보라/ 극도로 예민해진 저 종이 한 장의 고요”(<가을 들> 부분)

앞에 인용한 시가 종이의 쓰임을 다룬다면, 뒤의 것은 가을 들의 종이를 닮은 면모를 찬미한다. 마찬가지로, “누가 저렇게 푸른 종이를 마구잡이로 구겨 놓았는가”(<파도>)에서는 파도의 푸른 출렁임이 종이에 견주어지며, “나의 미래 나의 사랑 나의 꿈 나의 상상은 늘 종이배에 실려 있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띄워 보낸 종이배가 어딘가로 잘 가고 있었을까”(<종이배>)에서는 삶의 꿈과 지향이 ‘종이’배라는 상징에 얹혀 흘러간다.


신달자 시인.
신달자 시인.
“만져지기도 하는 소중하여 한 번 더 읽으려고 귀를 접기도 하는/ 졸다가 가슴에 얹기도 하는 두어 권 베개로 귀로 읽기도 하는 그 편안한/ 본성/(…)// 영원히// 제 몸을 헐어// 정신의 날을 가는// 숫돌의 힘.”(<종이책>)이 종이와 종이로 만든 책의 미덕을 직설적으로 표현한다면, 독자에게 좀더 흥미로운 것은 종이와 시인 자신의 관계를 알게 해 주는 시편들이다.

“치명적인 파산, 돌이킬 수 없는 작파라고 할까/(…)/ 아버지는 50권의 일기장 속으로 몸을 숨겼다/ 살았지만 죽었고 죽었지만 살았다 그렇게 하얗게 질려 종이 집에서 숨어 살았다”(<아버지> 부분)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문맹으로 피를 찍듯 가 나 다를 연습해서는/ 3년 만에 딱 한 장 딸에게 쓴 편지/ ‘내말 잇지마라라 주글대까지 공부하거라 돈 버러라/ 에미갓지 살지 마라라 행볶하여라’”(<각혈> 부분)

여자를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하고 바둑을 좋아했던 아버지는 나이 예순에 파산을 맞은 뒤 일기장 속으로 도피했다. 그런 지아비 때문에 궁궐 같은 기와집이 빚에 넘어간 뒤 수면제를 삼켰다가 깨어난 어머니는 각혈 같은 울음을 그친 뒤 비수를 갈듯 글을 익혀서는 유언 같은 편지를 딸에게 남긴다. 그렇다면 이제 딸의 차례.

“문 걸어 잠그고 나 그걸 종이에 묻혀 보았는데/ 살점도 아니고 붉은 피도 아니고/ 꽃은 더욱 아니었는데/ 첫 경도를 종이에 바친/ 종이에게 첫 여자를 바친/ 종이와 관계한/ 죽어도 끊을 수 없는/ 내가 가야 할/ 숙명적 비망록.”(<꽃 비친다 하였으나> 부분)

초경을 종이에 받아 낸 순간 시인의 운명은 결정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 시집 <종이>는 바로 그때 태동했던 것인지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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