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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내 집 벽장에 누군가 산다

등록 2011-04-08 21:16

<나가사키>
<나가사키>
일본신문에 났던 실화 소재로 프랑스 작가 에릭 파이 소설 써
1년간 남의 집에 숨어서 산 여자…그 집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가사키>
에릭 파이 지음·백선희 옮김/21세기북스·1만원

혼자 사는 당신의 집에 누군가 스며들어 일 년 가까이 당신도 모르게 동거하는 일이 생긴다면?

프랑스 작가 에릭 파이(48)의 소설 <나가사키>는 이런 아찔한 가정에서 출발한다. 지난해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받은 이 작품은 그러나 일본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재로 삼았다. 2008년 5월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일본의 여러 신문 사회면에 보도된 사건이 작가의 영감을 자극했다.

화자인 쉰여섯 살 독신남 시무라 고보가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집 안에서 자신도 모르는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냉장고 안에서 요구르트 한 병이 없어졌다든가 과일주스 병의 수위가 낮아졌다는 사실이 정리벽이 있는 그의 눈에 잡힌 것. 부엌에 웹캠을 설치해 놓고 사무실의 컴퓨터를 통해 관찰하던 중 낯선 침입자의 존재를 확인한다. 기겁한 그는 경찰에 전화해서 침입자의 존재를 알린다….

내 집 벽장에 누군가 산다
내 집 벽장에 누군가 산다

시무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그의 집에 일 년 가까이 숨어 살던 쉰여덟 살 여성을 현장에서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정작 소설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시무라 자신이 침입자를 경찰에 넘기는 데에 대해 확신을 지니지 못한다. 그가 경찰과의 통화를 끝내고 컴퓨터 화면을 통해 확인한바, 침입자는 부엌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을 만끽하며 반쯤 감은 눈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너무도 행복해 보이는 그 모습에 “갑자기 나는 마음이 아팠다.” 그는 다시, 이번에는 자신의 집으로, 전화를 건다. 여자더러 경찰이 오니 도망치라고 할 참이었는데, 당연히 여자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녀가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녀를 덫으로 내몬 내가 덫이 덮치기 전에 그녀를 구하려 애쓰고 있다는 걸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시무라가 유달리 착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겠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성품이 그의 행위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내가 설치해둔 유리장 속에서 카메라는 내 고독을 차가운 파노라마로 펼치고 있어 한참을 보니 오싹해진다.”

처음 부엌에 설치한 카메라를 통해 자신의 주거 공간을 지켜보면서 시무라가 받았던 느낌이다. 쉰여섯 살의 기상관측사인 그는 그 나이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자주 왕래하는 친지도 없이 고독한 삶을 살고 있다. 여자가 스며든 벽장 딸린 구석방도 손님을 맞을 요량으로 비워 두었던 것인데, 여동생 부부가 일 년여 전에 들른 뒤로는 인적이 끊긴 상태. 그렇다고 해서 사무실 동료들과 친하게 어울리지도 못하는 시무라는 자신의 집에 숨어든 여자한테서 자신과 닮은 절대 고독을 보았을 것이다. 그가, 여자가 읽다가 귀를 접어 놓고 간 자기 소유의 소설책을 감옥 안의 여자에게 보내줄 생각을 하는 장면은 ‘고독의 동지’로서 두 사람의 유대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자가 오랫동안 실업자로 지냈으며, 결국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 노숙자로 떠돌던 끝에 자신의 집으로 숨어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시무라는 언젠가 자신의 몫이 될 수도 있(었)을 낙오자의 운명에 눈을 돌린다. “나는 한 여자가 우리보다 먼저 먼지를 물고 쓰러졌으며, 갈 곳이 없어 도시의 감옥에서 강제로 피난처를 ‘구했다’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실존의 유대가 사회적 유대로 나아가는 모습이다.

소설 제목이 ‘나가사키’가 된 것은 사건이 벌어진 무대가 그곳인 탓도 있지만, 나가사키 앞 인공 섬 데지마가 지니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다. 쇄국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들에게 문호를 열되 그들의 활동 반경을 섬 안으로 국한했던 역사적 사실, 그리고 2차대전 말기에 히로시마와 더불어 원자폭탄 세례를 받아야 했던 이 도시의 아픔이 주인공들의 고독에 중첩된다. “내게는 나가사키가 줄지어선 네 개의 큰 방-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을 가진 일본이라는 거대한 집 안의 끝자락에 위치한 벽장처럼 오랫동안 버려져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설은 앞부분 3분의 2는 시무라의 시점으로, 뒷부분 3분의 1은 여자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여자가 하필 시무라의 집을 택한 까닭은 책 말미에서야 분명해지는데, 여자가 바로 그 집에서 여덟 살부터 열여섯 살까지 살았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때 독자는 놀라움 속에 싸한 통증을 맛보게 된다. 여자의 말을 들어 보라. “세상의 모든 헌법에 누구나 자신의 먼 과거의 장소로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는 불가침의 권리를 집어넣어야 할 거라고 저는 혼자 생각했지요.” 그렇다. 이것은 잃어버린 낙원과 되찾아야 할 왕국에 관한 이야기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21세기북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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