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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굽은 척추, 꿈의 나라로 가는 무지개 다리 됐네

등록 2011-05-06 20:20

안학수(57) 시인
안학수(57) 시인
문학으로 장애극복한 자전적인 첫 소설
스승 이문구 소설가와의 만남, 등단기 녹여


〈하늘까지 75센티미터〉
안학수 지음/아시아·1만2000원

“등에 공 하나 넣고/ 가슴도 불룩한 아저씨/ 움츠린 원숭이 목에/ 아이처럼 쪼끄맣다.// 가슴 만져 보고 등 두드려도/ 바보처럼 그냥 웃더니/ 몇 살이냐고 다정히 묻는다.”

안학수(57) 시인이 2004년에 낸 두 번째 동시집 <낙지네 개흙 잔치>에 실린 <꼽추 아저씨>의 첫 두 연이다. 아이의 눈에 이상하게 비친 ‘꼽추 아저씨’는 바로 안학수 시인 자신을 가리키거니와, 이 시는 아마도 그의 직접 체험에서 빚어진 것일 테다. 아이의 악의 없는 호기심에 바보 같은 웃음과 다정한 질문으로 응대하는 데에서는 장애로 인한 상처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모습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런 평정심을 찾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수치와 고통, 슬픔은 어느 만큼이었겠는가.

<낙지네 개흙 잔치>를 비롯해 세 권의 동시집을 펴낸 안학수 시인이 소설로는 처음 내놓은 <하늘까지 75센티미터>는 그가 어릴 적 당한 사고로 척추에 장애를 입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신체적 장애와 정신적 위축을 극복하고 문학에서 출구를 찾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너랑 나랑 둘이 존디루 가까?”


〈하늘까지 75센티미터〉
〈하늘까지 75센티미터〉
사고 뒤 하반신이 마비된 채 고통스러워하는 어린 아들을 등에 업은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며 비 온 뒤 불어난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소설 첫 장면은 고통스럽다. 소설 주인공 ‘수나’의 뇌리에 박힌 이 기억은 그의 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죽음은 마치 뚜껑을 열어서는 안 되는 봉인된 항아리처럼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어린 소년에게 장애란 몸을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만을 뜻하지는 않았다. 동네에서나 학교에서나 철없는 또래들의 놀림과 괴롭힘은 오히려 신체적 불구 이상으로 그를 지옥으로 몰아넣는다. 그 지옥의 한가운데에서 상처 입은 어린 영혼은 울부짖는다. “죽일 거여! 다 죽이고 말 거여! 가만히 있는 나를 왜 괴롭혀? 내가 뭘 잘뭇혔다구? 나쁜 새끼들! 모두 도끼루 박살 낼 거여!”

그럴 때마다 지혜롭고 자애로운 어른들이 등장해 지옥으로 향하는 수나의 발길을 돌려세운다. 그를 지독하게 괴롭히던 또래 영기의 아버지 ‘마빡 아저씨’, 그에게 동시집을 권해 줌으로써 문학에 눈뜨게 해 준 ‘장안선 선생님’,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한한 사랑으로 그를 보살피고 이끌어 준 어머니와 아버지, 누나 등 가족들 덕분에 그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신뢰를 되찾을 수 있었다. 특히 장안선 선생님의 권유로 읽게 된 동시집은 장애의 고통에서 벗어날 출구로서 문학의 세계를 알게 해 주었다.


“한 편 한 편 읽을 때마다 다른 세상을 만났다. 별나라로, 꽃마을로, 남쪽 나라로, 하늘 바다로, 다리 불편해서 가지 못하는, 아니 성한 다리로도 갈 수 없는 꿈과 상상의 나라로 마음껏 쏘다녔다.”

수나에게 성장이란 자신에게 장애를 입힌 이웃집 형 ‘두성’, 그리고 자신을 놀리고 괴롭힌 또래들을 향한 증오를 넘어서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퇴화된 다리 하나를 더 지닌 채 태어난 병아리를 “병신이라구 버릴 수는

어유”라며 애지중지하다가 실수로 밟아 죽인 일, 그리고 뒤이어 일어난 두성의 사고사는 그런 의미에서 수나의 성장에 마침표를 찍은 셈이었다. 직업훈련소에 입소하던 열여덟 수나의 독백은 그 점을 알려준다. “세상 모두가 수나를 괴롭혔지만 세상 모두가 수나를 강하게 키워 냈어요.”

여기까지가 말의 바른 의미에서 성장소설에 해당한다면, 그로부터 긴 세월을 훌쩍 건너뛴 소설 뒷부분은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와의 만남, 그리고 등단 과정에 할애된다. 충남 공주 출신이면서 보령에서 금은방을 하던 안학수 시인은 보령 출신으로 그곳 작업실에 머물며 글을 쓰던 이문구를 스승 삼아 모시며 가르침을 얻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일수록 문학적 자산이 풍부한 것”이라며 “어릴 적 상처를 문학으로 승화시키라”고 격려한 이문구의 조언이 그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소설의 앞뒤에는 힘든 가정 환경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는 초등학생 건이와의 만남과 이별을 다룬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붙어 있다. 이 중 에필로그의 마지막 대목에 이 작품을 통해 작가가 하려는 말이 잘 요약되어 있다.

“금붙이는 불에 달궈지고 모루에 두들겨지고 깎이고 다듬어져야만 제대로 빛이 나고, 어떤 생명체든 누구든 세상에 태어날 땐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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