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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산업화-민주화 틈새 ‘유령들’을 말하다

등록 2011-06-21 20:14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
파독 간호사·도시 빈민 등 ‘서발턴 연구’ 통해
‘희생 정당화’ 뉴라이트·‘전형화’ 민중사 비판
“박정희 시대는 이들이 주체성 빼앗긴 때” 강조
‘박정희 시대의…’ 펴낸 김원 교수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의 성과를 강조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때 우리나라엔 산업화에 목숨을 건 사람들만 가득했던 것만 같다. 그 시절 치열했던 민주화 투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억압받던 모든 사람들이 ‘민중’으로 하나 되어 독재에 맞섰던 것처럼 느껴진다. 과연 박정희 시대 사람들을 산업화 세력 또는 민주화 세력으로 뭉뚱그려 부르는 것이 가능할까?

바로 여기에 역사의 주체를 설정해 온 근대 역사학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김원(41·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가 최근 펴낸 <박정희 시대의 유령들-기억, 사건 그리고 정치>는 그동안 지배담론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목소리 없는’ 주체들을 중심으로 박정희 시대를 읽어낸 책이다. 책에서 제시하는 목소리 없는 주체들은 파독 간호사, 광산 노동자, 도시 빈민, 소년원생, 범죄자 등이다.

지난 16일 만난 김 교수는 “지배담론으로는 그 존재가 포착된 적이 없는 ‘유령’들을 통해 민족, 국가 그리고 표준화된 근대를 정상사회의 기준으로 만든 ‘아버지 세대’의 유산을 극복하려고 했다”며 이 책을 쓴 동기를 밝혔다.

<잊혀진 것들에 대한 기억>, <여공 1970, 그녀들의 반(反)역사> 등 전작들에서부터 김 교수가 일관되게 펼치고 있는 연구는 크게 ‘서발턴 연구’라 부를 수 있다.

‘하위’(sub)라는 말과 ‘타자’(altern)라는 말이 결합된 서발턴은, 민족이나 계급 등 지배적 담론들이 규정하는 정체성에는 포함되지 않는 존재를 뜻한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처음 썼던 이 말을 인도 학자 라나지트 구하가 적극적으로 수용해 하나의 연구 경향으로 발전시켰다. 그 뒤 가야트리 스피바크, 호미 바바 등 탈식민주의 학자들의 비판을 통해 그 개념이 더욱 확장됐다. 학자들마다 입장의 차이는 있지만, 근대적 주체라 부르기 어려운 농민, 노동자, 룸펜, 노숙자 등 광범위한 비서구 사회의 종속 집단을 연구한다는 경향은 대체로 일치한다.

김원(41)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김원(41)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60~70년대 한국현대사를 전공한 김 교수는 “조직된 것, 곧 제도화되고 질서화된 것만을 유의미하다고 보는 기존 지배담론에 의문을 느껴 서발턴 연구에 파고들게 됐다”고 한다. 그가 박정희 시대의 서발턴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택한 방법은 두가지다. 하나는 파월 병사나 파독 노동자, 기지촌 여성, 도시 하층민 등의 ‘구술’을 통해 그들의 목소리를 재현하려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무등산 타잔’ 박흥숙, 광주대단지에서 일어났던 봉기, 소년원생들의 탈주 등 ‘사건’들을 통해 그들의 존재를 읽어내는 것이다.

이런 연구작업을 통해 그가 먼저 비판의 화살을 겨누는 지점은 뉴라이트의 역사인식이다. ‘산업전사’로 불렸던 파월 병사나 파독 노동자, 기지촌 여성, 도시 하층민들이 말하는 고통과 트라우마를 통해, 그는 ‘국민국가 건설과 조국근대화’를 내세워 이들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는 뉴라이트 계열 역사인식의 허구성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산업화의 피해자로 전형화하는 기존의 민중사·계급사에도 비판의 날을 세운다. 무등산 타잔 사건이나 광주대단지 사건 등은 비정상인의 폭력과 범죄로 치부됐고 민중사·계급사도 이들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 교수는 도시공간의 형성이 도시 빈민을 만들어내고 이들을 분리하고 배제했던 사회적 상황 등을 냉철하게 분석하며, 이들 도시 하층민들이 일으킨 사건들과 광주항쟁 등 ‘민중’ 봉기로 평가되는 사건들 사이에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묻는다. 민족·계급 등 근대적 정체성을 기준으로 민중이라는 주체를 설정하고, 이에 걸맞지 않으면 배제하고 묻어버린 지식체계 자체를 문제삼는 것이다. 부마항쟁의 성격을 두고 ‘반독재민중항쟁’이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배제된 도시 하층민들이 대규모로 참여한 ‘서발턴들의 봉기’로 풀이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지만 김 교수는 자신의 연구가 기존 지배담론들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진 않는다. 그는 “내 작업은 기존의 지배담론에 경계와 자극을 줘, 그 한계를 일깨우기 위한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는 박정희 시대가 무엇이든 제도화하고 질서화했던 ‘아버지 세대’의 출발점이며, 아직까지 극복되지 못한 현재진행형이라고 본다. 뉴라이트 역사나 민중·계급사가 모두 묶여 있는 ‘아버지 세대’의 담론에 불온한 균열을 일으키는 것이 서발턴 연구의 구실이라는 것이다.

김 교수는 특히 서발턴들에게 박정희 시대가 “사회구성원이자 정치적인 것을 구성할 수 있는 주체의 자격을 빼앗긴 때”라는 점을 강조하며 서발턴 연구의 정치 담론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했다. 그는 ‘아줌마’란 이름으로 정치로부터 추방당했던 ‘현실 속 서발턴’들이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2011년 홍익대 청소용역 노동자들의 ‘점거 농성’이란 사건을 통해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찾아 나선 것을 그 사례로 제시했다.

글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사진 김봉규 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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