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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배교와 순교 사이로 ‘가고가리’는 날아가고…

등록 2011-10-23 20:18

김훈
김훈
김훈의 새 소설 ‘흑산’
천주교 박해하던 조선 시대
정약전과 황사영 삶과 죽음
당시 사회상 촘촘하게 묘사
새 ‘가고가리’는 진화의 표상
김훈(사진)의 새 소설 <흑산>(학고재)은 정약전이 유배지 흑산도로 가기 위해 무안 포구에서 대기하는 장면으로 문을 연다. 약전은 천주교에 연루된 혐의로 문초를 당한 끝에 유배 결정을 받아 든 터였다. 함께 붙잡혔던 동생 둘 가운데 약종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참수되었고, 막내 약용은 천주를 부인하고 신도들을 밀고한 덕분에 약전과 마찬가지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약전이 유배지 흑산도에서 살아 나오지 못한 것과 달리 약용은 18년의 유배를 끝내고 향리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소설 <흑산>은 이 형제들의 엇갈린 운명 대신 약전과 그의 조카사위 황사영의 삶과 죽음에 초점을 맞춘다. 이른바 ‘황사영 백서사건’의 주모자인 황사영은 첫째처삼촌인 약종과 마찬가지로 신앙과 목숨을 맞바꾼 믿음의 인간. 반면 약전은 천주교라는 사학(邪學)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과 타협하고 유배지에서 어패류와 갑각류의 생태를 궁구하다 고종명했다.

이 두 사람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김훈적’ 인물에 가까운지는 자명하다. 김훈은 소설 후기에서 “나는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며 “말이나 글로써 설명할 수 없는 그 멀고도 확실한 세계를 향해 피 흘리며 나아간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또 괴로워한다”고 고백한다. 그가 두려워하고 괴로워하는 신념과 이상의 인간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정약종과 황사영 같은 순교자들일 테다.

그렇다면 약전은 어떠할까. 문장과 학식의 그림자조차 만나 볼 수 없는 절해고도 흑산에서 한갓 필부의 삶을 살게 된 자신의 운명을 그는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섬에서 그의 짝으로 맺어진 과부 순매와 합방할 때, 그리고 그의 물고기 관찰을 돕는 청년 창대의 질문에 답하면서 그는 ‘당면’과 ‘지금 여기’의 삶이 엄중함을 주문처럼 되뇐다.

“순매의 몸을 안으면서, 정약전은 끌려온 곳에서 살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당면한 곳만이 삶의 자리라고, 질퍽거리는 순매의 몸이 말하고 있었다.”

“자(玆)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흑(黑)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뒤의 인용은 약전이 자신의 호를 ‘자산’으로 삼게 되고 결국 <자산어보>라는 어류 생태 보고서를 집필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준다.

약전이 창대의 도움을 받아 가며 <자산어보>의 항목들을 채워 나갈 때 황사영은 배론의 토굴에서 결국 자신의 죽음을 몰고 올 백서를 쓴다. 백서가 들통난 뒤 그가 서소문 밖에서 망나니의 칼을 받는 한편, 약전은 흑산도에 서당을 새로 짓고 섬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한다는 소설의 결말은 두 주인공의 엇갈린 운명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작가가 어느 한쪽을 편들고 있지는 않다. 순교를 택한 약종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배교를 택한 약용도, 그 두 동생 사이에서 어쩌면 둘의 순교와 배교 덕분에 목숨을 부지하게 된 약전의 선택도 두루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인 듯하다. 책의 속표지에 그가 그린 괴이한 새 ‘가고가리’는 그런 다양한 판단과 실천들이 모여 수억만 년 진화의 여정을 나아가는 생명의 움직임을 표상한다.

<흑산>이 약전과 황사영의 삶과 죽음을 축으로 짜였다지만, 소설 속에는 그들 말고도 수많은 계층과 성격의 인물들이 작용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도 어디까지나 제각각의 삶을 살아 나간다. 굳이 두 사람만을 소설 주인공이라고 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황사영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처형당한 늙은 소작농의 아내가 지었다는 언문 기도문은 조선의 백성들에게 천주교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지, 약전의 배교와 황사영의 순교가 어떤 배경을 거느리고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주여, 우리를 매 맞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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