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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능청스런 무규칙 작법, 또 배꼽을 간질이네

등록 2011-12-11 20:29

박형서
박형서
박형서 소설 `핸드메이드 픽션’
멸치 실종 `자정의 픽션’ 등
4년간 쓴 8편의 단편 모아
이질적 세계 버무려 웃음줘
“글 쓸때마다 새 스타일 찾아”
박형서(사진)가 2006년에 낸 두 번째 소설집 <자정의 픽션>에는 ‘자정의 픽션’이라는 제목의 단편이 들어 있지 않다. 그 제목을 단 단편은 그가 이번에 낸 세 번째 소설집 <핸드메이드 픽션>에 수록됐다. <핸드메이드 픽션>에도 같은 제목의 단편은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이라면 그의 네 번째 소설집에 ‘핸드메이드 픽션’이라는 단편이 포함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소설집 제목은 그 책에 수록된 작품의 제목에서 가져오는 것이 일반적인데, 박형서는 그런 일반적인 규칙을 좇지 않는다. 새 소설집 제목에 대해 그는 “4년여에 걸쳐 쓴 작품들이라 하나로 묶을 만한 제목이 마땅치 않았다”며 “대신, 이 소설들을 모두 ‘내 손으로 썼다’는 자부심을 제목에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박형서는 한국 문단에서 가장 독특한 소설을 쓰는 작가 중 하나다. 박형서 소설의 독특함은 그가 소설에 관한 고정관념과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린다는 데에 있다. 두 번째 소설집에 실린 <‘사랑손님과 어머니’의 음란성 연구>라는 단편은 ‘개콘보다 웃기는 소설’이라는 평을 들은 바 있지만, 웃음과 해학이 박형서 소설이 지닌 개성의 전부는 아니다. 그보다는 엄숙한 논문 형식을 통해 터무니없는 주장을, 능청스럽게 늘어놓는 데에서 오는 이질감이 독서의 쾌감을 불러왔던 터였다.

이번 소설집에 실린 여덟 단편 중에서는 <열한시 방향으로 곧게 뻗은 구 미터가량의 파란 점선>이라는 작품이 비슷한 계열이라 할 수 있다. 문헌고증학과 교수와 학생들이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에 나오는 산신령이 실재한다는 것을 ‘고증’하고자 의암호 인근의 연못에서 실험을 하는 것이 이야기의 얼개다. 일행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산신령과 조우하고 금도끼와 은도끼도 손에 넣게 되는데, “우랄-알타이어 사용집단과 흡사한 성대 구조를 지녔고 육십 대 중반의 음성을 방출한다”는, 산신령에 관한 정보 분석은 과학과 설화라는 이질적인 세계를 한데 버무림으로써 독자의 웃음을 자아낸다.

단편 <자정의 픽션>에서 임대연립주택의 젊은 부부는 냉장고에 넣어 둔 마른멸치들이 보이지 않자 그 행방을 놓고 이런저런 추리를 펼친다. 그 과정에서 한쪽이 “멸치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우정이 깊은 생명체”라 주장하자 다른 쪽이 진지하게 대꾸한다. “들은 거 같기도 해. 중학교 체육시간이었나, 아마 그럴 거야.” 부창부수라 했던가. 부부는 주거니 받거니 지도자 성범수를 비롯한 아홉 마리 멸치들이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로 몸을 불린 다음 화장실 변기를 통해 탈출해서는 고향 남해를 향해 머나먼 여정에 오르는 이야기를 꾸며 낸다. 탈출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은 장재일 멸치는 동료 멸치들에게 “누구라도 이야기를 들려줘. 내가 다 나을 때까지, 멋지게 헤엄칠 수 있을 때까지”라 주문하는데, 그 주문에 응해 다른 멸치가 들려주는 이야기인즉, 임대연립주택의 가난한 부부가 마른멸치 실종 사건을 두고 벌이는 터무니없는 추리. 그러니까 이 소설은 이야기의 안과 밖이 맞물리는 뫼비우스의 띠 형태를 띠고 있다.

이밖에도 “수년 내에 쓸 장편소설에 대한 일종의 계획안”을 표방한 <나는 ‘부티의 천 년’을 이렇게 쓸 것이다>, 길고양이 성범수가 옥탑방에 살던 인간 ‘나’의 신분을 가로챈다는 내용의 <갈라파고스>, 바위에 난 구멍에 머리를 박고 죽어 가는 시골 사람들의 의문의 연쇄 죽음을 추리적 기법으로 다룬 <너와 마을과 지루하지 않은 꿈> 등에서도 박형서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들려준다. “내 나이에 고정된 스타일을 갖는다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쓸 때마다 새로운 스타일을 찾는 편”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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