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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연은 멋진 일, 죽음도 서늘히 웃게 하는…

등록 2011-12-18 19:06

윤성희 새 소설집 ‘웃는 동안’
유령이 화자인 세편 등 묶어
죽은 자와 산자의 시선 통해
비극 앞 웃음 치유효과 관찰
윤성희의 세 번째 소설집 <감기>(2007)에 실린 단편 <하다 만 말>은 말미께에 가서야 소설 화자가 이미 죽은 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독자에게 서늘한 충격을 준 바 있다. 그 뒤 ‘유령 화자’에 재미를 들인 것일까. <감기> 이후 4년 만에 내놓은 윤성희의 새 소설집 <웃는 동안>(문학과지성사)에는 유령 화자를 등장시킨 작품이 세 편이나 들어 있다. 이쯤 되면 유령 화자에 관한 ‘저작권’을 주장할 만도 해 보인다.

책 맨 앞에 실린 <어쩌면>은 수학여행을 가던 중 교통사고로 죽은 네 명의 여고생이 주인공이고 그중 하나인 ‘나’를 화자로 삼는다. 표제작 <웃는 동안>은 죽은 화자 ‘나’의 눈으로 남은 세 친구의 언행을 관찰하며, <눈사람>의 화자 ‘나’ 역시 죽은 지 오래되어 살이 다 썩어 버린 노인이다.

사고가 되었든 병이 되었든 죽은 이들은 이승에 미련이나 원한이 남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윤성희 소설의 죽은 화자들은 자신에게 닥친 죽음이라는 사태를 담담하다 못해 즐겁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에서 죽은 여고생들은 생명선이 긴 손금이라든가 딸만 셋을 낳을 거라는 사주를 근거로 자신들의 이른 죽음에 항의하지만, 그 어조는 사뭇 명랑하고 유쾌하기까지 하다. “이제부터 우린 뭐든 공짜”라며 죽은 이의 ‘특권’을 상기시키거나 놀이공원의 가짜 귀신들을 보면서 놀라는 장면 등에서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차라리 축제처럼 다가오는 것 같다.

<웃는 동안>에서도 죽은 화자는 생전의 절친이었던 나머지 세 친구의 동선을 좇으며 그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고 그에 대한 품평을 내놓고는 한다. 부도 난 아들이 유산을 압류당하지 않기 위해 아버지의 시신을 지하실에 방치해 두는 <눈사람>의 이야기에서도 죽은 아버지는 생전과 마찬가지로 자식과 손주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렇듯 윤성희 소설의 죽은 화자들은 산 자들의 곁에 머물면서 그들과 ‘더불어’ 사는 존재들이다.

“웃는 동안 녀석들은 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갔다.(…)웃고 난 후에 녀석들은 이런 자신감이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공중부양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웃는 동안>의 말미에 나오는 인용문은 죽음 또는 그와 비슷한 비극적 사태 앞에서 웃음이 지니는 치유 효과를 알려준다. 그렇다면 이런 문장은 어떨까?

“우는 동안 그녀는 온몸이 뿔뿔이 흩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부메랑>에서 주인공 ‘그녀’가 동창 친구를 모욕했던 자신의 말을 떠올리면서 후회하고 반성하는 대목이다. ‘그녀’와 동창은 죽은 어머니들의 생전 돈거래를 따지다가 모욕을 주고받은 뒤 헤어졌던 터였다. <부메랑>을 비롯한 윤성희의 또다른 소설들에는 주인공이나 화자가, 자신이 직간접적인 빌미를 제공한 가까운 이들의 죽음 앞에 ‘울음’으로 속죄하는 장면도 여럿 등장한다. <5초 후에>에서는 주인공 와이(Y)의 친구 제이(J)가, 다름 아닌 와이의 여행 제안에 응했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으며, <느린 공, 더 느린 공, 아주 느린 공>에도 학교 시절 화자의 형이 놀리기 시작하면서 다른 모든 학생들한테 따돌림을 당한 끝에 죽고 만 여학생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5초 후에>와 <느린 공…>의 살아남은 자들이 반드시 눈물과 통곡으로 죄책감을 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생기 없는 삶은 그들이 온몸으로 우는 울음이라 할 법하다.

윤성희 소설에서 죽음은 필연이라기보다는 우연한 사건에 가깝다. “위암 말기였지만 어처구니없게(…) 심장마비로 눈을 감”(<느린 공…>)기도 하는 것이 세상이다. 죽음과 사고가 난무하는 윤성희 소설의 세계가 뜻밖에도 따뜻하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것은 이런 우연성의 미학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우연이란 한 인간이 태어나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멋진 일”(<부메랑>)이라는 작중 인물의 믿음을 작가 역시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글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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