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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간이 비튼 ‘기억의 저편’에 저주의 편지가

등록 2012-04-01 20:52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원제 The Sense of an Ending) 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펴냄.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원제 The Sense of an Ending) 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펴냄.
영국 맨부커상 수상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맨부커상의 지난해 수상작인 줄리언 반스(66·사진)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원제 The Sense of an Ending)가 번역돼 나왔다. 최세희 옮김, 다산책방 펴냄.

반스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10과 1/2장으로 쓴 세계역사> 같은 작품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작가. 프랑스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유럽에서 주는 상을 여럿 받았지만 유독 본바닥 영국의 문학상과는 인연이 없었다. 1984년과 1998년, 2005년에 이어 네번째 도전 만에 지난해 10월18일 드디어 반스가 맨부커상 수상자로 결정되자 ‘늦은 감이 있지만 받을 사람이 받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소설은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파고든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이 마모시키고 왜곡시키는 기억,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파국적 결과를 다룬다.

소설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뉘며, 둘 사이에는 40년이라는 시간의 간극이 흐른다. 1부에서는 주인공이자 화자인 토니 웹스터의 고교 시절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는 책에 굶주려 있었고, 섹스에 굶주려 있었고, 성적표에 연연하는 아나키스트였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토니와 다른 두 친구, 그리고 뒤늦게 전학 온 에이드리언 핀으로 이루어진 사총사를 가리킨다. 청춘 특유의 반항심과 허영기로 무장한 이 동아리에서도 에이드리언은 특출난 지적 능력으로 나머지 친구들의 존경과 선망을 받는다.

고교 졸업 뒤 에이드리언은 장학생으로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하며, 토니를 비롯한 다른 친구들은 그보다 급이 떨어지는 대학으로 진학하거나 곧바로 사회에 진출한다. 어느 날 에이드리언이 토니에게 편지를 보내, 토니의 헤어진 여자친구 베로니카와 데이트를 해도 되겠는지를 물어오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토니는 짐짓 쿨하게 둘의 관계를 인정하는 엽서를 보내고 그 일을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반년 남짓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기다리는 것인즉 에이드리언이 자살했다는 소식이었다.

줄리언 반스(66) ⓒ엘런 워너
줄리언 반스(66) ⓒ엘런 워너
친구의 여자친구 사랑한
절친의 돌연한 자살소식
40년 뒤에 날아든 유언장
충격적 기억여행 부추겨

에이드리언은 검시관에게 남긴 편지에서 자신의 자살이 ‘원치 않았던 삶이라는 선물을 포기하는’ 철학적 선택이었음을 밝혔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토니가 감당해야 할 윤리적 책임과 의무는 소설 2부에서 그로부터 무려 40년의 시차를 두고 날아든 한 통의 유언장이 뒤늦게 환기시킨다. 베로니카의 어머니 사라 포드 부인이 토니에게 오백 파운드의 ‘유산’과 함께 보낸 유언장은 그로 하여금 세월의 흐름 속에 마모되고 왜곡된 기억의 원형을 찾아 시간 여행을 떠나도록 부추긴다.

그렇게 타의에 의해 떠난 기억 여행에서 토니가 확인하는 핵심적인 사실은 그가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연애를 쿨하게 인정하기는커녕 둘에게 끔찍한 저주의 언사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자신이 한 행동조차 정확히 기억하고 전달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토니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에 해당한다. 그런 토니에게 베로니카는, 구두쇠 스크루지의 죽은 동업자 말리처럼, 그가 부인하고 싶어하는 진실을 직시하도록 안내하고 충고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미욱하기만 한 토니는 베로니카의 마지막 선의를 받아들이는 데에도 실패하고 만다.

소설의 결말부는 제아무리 명민한 독자라도 ‘예감’하기 어려웠을 충격적인 반전을 마련해 놓는다. 그리고 그 반전이 철없던 시절 토니가 보내 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저주의 편지와 닿아 있는 지점을 확인하면서 독자는 말을 잃은 채 토니와 함께 먹먹한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번역본으로 250쪽 남짓한 짧은 분량의 소설이지만, 압축적이고 밀도 높은 문장이 풍부한 생각 거리를 주는 작품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사진 다산책방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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