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20년만에 다시 한국 떠나는 지명관 전 석좌교수
귀국 20년만에 다시 한국 떠나는 지명관 전 석좌교수
열흘 뒤 막내아들 곁으로 미국 이민
남은 인생 화두는 ‘통일 이후 미래상’
“정파적 이해 넘어선 시민세력 필요” “박근혜씨는 대통령이 되면 안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잇겠다는 집념은 대단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될 수 없고 지도력도 없습니다. ‘내가 하겠다’고 나서기보다는 ‘나는 통일 한국을 대표할 지도자를 지지하겠다’는 자세가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1970~80년대 20여년간 일본에서 군사독재에 맞섰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의 비밀 필자 ‘티케이(TK)생’ 지명관(89·사진) 전 한림대 석좌교수는 지난달 27일 단호한 목소리로 ‘유신세력의 회생’을 비판했다. 1993년 귀국해 언론계와 학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펴온 그가 20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안양시 평촌의 자택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아들만 셋을 둔 부부는 미네소타대학 교수인 막내 용인씨 가족과 여생을 보내고자 며칠 전 출국했다. “말년에 다시 떠난다고 하니까 혹시 한국이 싫어서 그런가 짐작들도 하는데… 오히려 난 한국인 특유의 긍정적 기질을 좋아하고 한국의 미래를 낙관해요. 어려울 때일수록 정을 나누고 힘을 모아서 이겨내는 독특한 기운 같은 게 있어요.” 바로 그런 긍정의 기질 덕분에 일제는 물론이고 박정희 이래 30년 군사독재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라는 얘기다. 그 예로, 그는 63년 한일회담 반대 칼럼 파문 이래 월간지 <사상계> 주간과 덕성여대 교수 시절은 물론이고 일본 망명 내내 그를 감시했던 ‘정보부 기관원’들과 인연을 소개했다. “유신 직전 필화 사건으로 조사를 받는데 윗사람이 큰소리로 윽박을 지르는 와중에 다른 요원이 신문지 귀퉁이에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라고 적어서 몰래 보여주더라구요. 도쿄에서도 한번은 서울에서 보내온 ‘김지하 석방운동’ 정보와 전세금이 들어 있는 서류 봉투를 찻집에 깜빡 두고 나왔는데, 당연히 미행하던 담당 요원이 챙겨갔겠죠. 그런데 며칠 뒤 찾아와 ‘서울에 보고하지 않았으니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어요. 내가 <세카이>의 ‘티케이생’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덮어준 거지.” 개인보다는 조직을 먼저 따르는 일본인의 ‘다테샤카이’(縱社會) 정신과 뚜렷히 대비되는 한국인의 그런 온정주의가 어쩌면 오늘의 ‘불쌍한 박근혜 현상’을 낳은 것일 수도 있다는 데 그는 동의했다. 18년 철권통치로 수많은 민주시민을 희생시킨 독재자의 후손들이 ‘보복도 추방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을 뿐더러 당당하게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는 뜻이다. 그에게는 일본에서 그를 보호해준 세 명의 은인이 있었다. 애초 72년 일본 유학을 권했던 선우휘 당시 <조선일보> 주필, 73년 귀국을 말리며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맡도록 주선하고 내내 후원해준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의 간사 오재식 박사, <세카이>의 야스에 편집장이다. 특히 평북 정주의 고향 동네 선배인 선우휘는 그가 티케이생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직접 확인하지 않았을뿐더러 친밀했던 정권쪽에 ‘티케이생은 여러명이다’라는 거짓 정보를 전하기도 했단다. 그는 떠나는 길에 미안했던 일들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초기 한국방송 이사장으로서 정연주 사장의 취임을 비판했던 그는 “개인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방송사 내부 발탁이 바람직하다는 소신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미국에 가면 늘 시끄럽고 어지러운 일상을 벗어나 객관적 위치에서 명상의 자세로 한국의 앞날을 바라보고 싶어요.” 2004년 펴낸 회고록의 제목처럼 <경계를 넘는 여행자>의 길을 다시 나서는 그는 여생의 화두로 ‘한반도 통일 이후 미래상’을 두고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해 통일에 이르는 과정, 남북의 분열을 넘어 동질성을 회복시키는 ‘마음의 화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전제한 그는 보수냐 진보냐, 정파적 이해를 넘어선 제3세력, 시민세력의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식인들, 그리고 한국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가 그 몫을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그는 당부했다. 2008년 2월25일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 소회까지 담아서 펴낸 <나의 정치일기>(2009·소화) 속편을 미국에서도 계속 쓸 작정인 그는 “기운이 다할 때까지 쓸 테니 아마도 사후 미완성의 유작으로나 볼 수 있겠다”며 씁쓸히 웃었다. 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촛불집회 1시간 전…사회자 ‘이상한 긴급체포’
■ “박근혜, 진주만 와서 수영해보라고 하고싶다”
■ 통합진보당, 비례당선 6명 어떻게 될까
■ ‘기생독신’ 10년새 85% 늘어
■ 동일본 대지진에 제주 지하수 2m까지 ‘출렁’
남은 인생 화두는 ‘통일 이후 미래상’
“정파적 이해 넘어선 시민세력 필요” “박근혜씨는 대통령이 되면 안 됩니다. 아버지의 뜻을 잇겠다는 집념은 대단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정치세력이 될 수 없고 지도력도 없습니다. ‘내가 하겠다’고 나서기보다는 ‘나는 통일 한국을 대표할 지도자를 지지하겠다’는 자세가 바람직하지 않을까요?” 1970~80년대 20여년간 일본에서 군사독재에 맞섰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의 비밀 필자 ‘티케이(TK)생’ 지명관(89·사진) 전 한림대 석좌교수는 지난달 27일 단호한 목소리로 ‘유신세력의 회생’을 비판했다. 1993년 귀국해 언론계와 학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펴온 그가 20년 만에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경기도 안양시 평촌의 자택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아들만 셋을 둔 부부는 미네소타대학 교수인 막내 용인씨 가족과 여생을 보내고자 며칠 전 출국했다. “말년에 다시 떠난다고 하니까 혹시 한국이 싫어서 그런가 짐작들도 하는데… 오히려 난 한국인 특유의 긍정적 기질을 좋아하고 한국의 미래를 낙관해요. 어려울 때일수록 정을 나누고 힘을 모아서 이겨내는 독특한 기운 같은 게 있어요.” 바로 그런 긍정의 기질 덕분에 일제는 물론이고 박정희 이래 30년 군사독재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라는 얘기다. 그 예로, 그는 63년 한일회담 반대 칼럼 파문 이래 월간지 <사상계> 주간과 덕성여대 교수 시절은 물론이고 일본 망명 내내 그를 감시했던 ‘정보부 기관원’들과 인연을 소개했다. “유신 직전 필화 사건으로 조사를 받는데 윗사람이 큰소리로 윽박을 지르는 와중에 다른 요원이 신문지 귀퉁이에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라고 적어서 몰래 보여주더라구요. 도쿄에서도 한번은 서울에서 보내온 ‘김지하 석방운동’ 정보와 전세금이 들어 있는 서류 봉투를 찻집에 깜빡 두고 나왔는데, 당연히 미행하던 담당 요원이 챙겨갔겠죠. 그런데 며칠 뒤 찾아와 ‘서울에 보고하지 않았으니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어요. 내가 <세카이>의 ‘티케이생’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덮어준 거지.” 개인보다는 조직을 먼저 따르는 일본인의 ‘다테샤카이’(縱社會) 정신과 뚜렷히 대비되는 한국인의 그런 온정주의가 어쩌면 오늘의 ‘불쌍한 박근혜 현상’을 낳은 것일 수도 있다는 데 그는 동의했다. 18년 철권통치로 수많은 민주시민을 희생시킨 독재자의 후손들이 ‘보복도 추방도’ 당하지 않고 살아남았을 뿐더러 당당하게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 됐다는 뜻이다. 그에게는 일본에서 그를 보호해준 세 명의 은인이 있었다. 애초 72년 일본 유학을 권했던 선우휘 당시 <조선일보> 주필, 73년 귀국을 말리며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맡도록 주선하고 내내 후원해준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의 간사 오재식 박사, <세카이>의 야스에 편집장이다. 특히 평북 정주의 고향 동네 선배인 선우휘는 그가 티케이생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한번도 직접 확인하지 않았을뿐더러 친밀했던 정권쪽에 ‘티케이생은 여러명이다’라는 거짓 정보를 전하기도 했단다. 그는 떠나는 길에 미안했던 일들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고 말했다. 참여정부 초기 한국방송 이사장으로서 정연주 사장의 취임을 비판했던 그는 “개인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방송사 내부 발탁이 바람직하다는 소신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미국에 가면 늘 시끄럽고 어지러운 일상을 벗어나 객관적 위치에서 명상의 자세로 한국의 앞날을 바라보고 싶어요.” 2004년 펴낸 회고록의 제목처럼 <경계를 넘는 여행자>의 길을 다시 나서는 그는 여생의 화두로 ‘한반도 통일 이후 미래상’을 두고 있다. “다음 세대를 위해 통일에 이르는 과정, 남북의 분열을 넘어 동질성을 회복시키는 ‘마음의 화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전제한 그는 보수냐 진보냐, 정파적 이해를 넘어선 제3세력, 시민세력의 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식인들, 그리고 한국 교회를 비롯한 종교계가 그 몫을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그는 당부했다. 2008년 2월25일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 소회까지 담아서 펴낸 <나의 정치일기>(2009·소화) 속편을 미국에서도 계속 쓸 작정인 그는 “기운이 다할 때까지 쓸 테니 아마도 사후 미완성의 유작으로나 볼 수 있겠다”며 씁쓸히 웃었다. 글·사진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 촛불집회 1시간 전…사회자 ‘이상한 긴급체포’
■ “박근혜, 진주만 와서 수영해보라고 하고싶다”
■ 통합진보당, 비례당선 6명 어떻게 될까
■ ‘기생독신’ 10년새 85% 늘어
■ 동일본 대지진에 제주 지하수 2m까지 ‘출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