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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유연하고 날쌘 비유로 위로한 ‘아픈 사회’

등록 2012-08-19 20:11

시인 진은영(42)
시인 진은영(42)
진은영 세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
용산참사·한진중·두리반 현실을
자신만의 미학적 언어로 벼려내
시와 정치 결합된 이미지로 구현
시인 진은영(42·사진)은 최근 몇 해 사이 사회적 상처와 치부의 장소로 자주 걸음을 놓았다. 용산참사 현장, 부산 한진중공업, 철거 대상인 홍대앞 식당 두리반과 명동의 카페 마리 등이 그곳들이다.

앞선 두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2003)과 <우리는 매일매일>(2008)에서 독창적인 비유와 모호하면서도 매혹적인 감각의 세계를 과시했던 이 모더니스트에게 사회적 죽음과 해고, 철거 같은 긴박한 생존 투쟁의 현실은 일종의 미학적 충격으로 다가왔을 법하다. <창작과 비평> 2008년 겨울호에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시의 정치성에 관한 논의를 촉발한 것이 그였다. 얼마 전 <한겨레21>의 ‘표지 이야기’에 실린 대담에서 “미학적 아방가르드를 추구해 온 젊은 작가들에게 일종의 자기쇄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밝힌 것 역시 그 글의 연장으로 볼 수 있다.

진은영이 새로 내놓은 세 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창비)에서도 시와 정치의 관계를 놓고 그동안 그가 수행한 고민의 흔적을 적잖이 엿볼 수 있다.

“망루에서 죽은 자에게/ 빌딩처럼 멋진 묘비를 세워주는 도시는/ 어디 있나”(<지도를 찾아서> 부분)

“꿈속을 걸으면서 너는 기억하네/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크고 둥근 식탁/ 부드럽고 위태로운 장소의 이름 속으로/ 너는 들어오겠지, 둘러앉아 우리 무얼 먹을까 궁리하며”(<몽유의 방문객> 부분)

각각 용산참사와 두리반 사태를 떠오르게 하는 작품들이다. 물론 진은영이 첨예한 사회적 현안을 노래할 때에도 그 어조와 형식은 지난 시기의 ‘생경한’ 투쟁시들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장기인 유연하고 자유로운 이미지의 흐름, 그리고 언어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한 탐구와 모색을 놓치지 않는다. 좀더 ‘화끈한’ 시적 발언을 기대하는 독자들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진은영이 지향하는 것이 정치에 대한 시의 투항이 아니라 시와 정치의 생산적 결합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인 진은영이 기여할 바는 자신의 특장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더욱 잘 벼리는 데에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망각은 없다>라는 작품을 보자.

진은영 세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
진은영 세번째 시집 ‘훔쳐가는 노래’
“세상에서 강을 제일 증오하던 왕이 있었다/ 그는 죽었다/ 태어나 정치가가 되었다”

인용한 대목에서 4대강 사업을 통해 강을 망가뜨린 정치가를 연상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시가 여기에서 끝났다면 평이하다 못해 진부하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진은영은 한발 더 나아간다.

“세상에서 강을 제일 증오하던 왕이 있었다/ 나는 죽었다 다시 태어나/ 그를 정치가로 만들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던 것을/ 가장 증오하는 사람”

왕이 환생한 정치가가 강을 증오하고 파괴할 수는 있겠지만, 그에게 그런 권리를 준 것은 강을 사랑한 ‘나’라는 뼈아픈 역설이 이 시에 복합적인 울림을 준다. 강을 파괴한 범인이 정치가라면 그런 그를 정치가로 만들고 강을 파괴하도록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나’라는 통렬한 반성이 이 시를 새롭게 만든다. 그런 반성을 거친 뒤에 강과 ‘나’의 슬픈 동일시가 음울한 묵시록적 비전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보라. 게다가 묵시록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저 ‘날쌘’ 비유라니!

“강은 죽었다가// 곧 태어나 내 몸이 되어 올 것이다/ 신비한 질병과 미지의 악취를 릴레이 주자의 날쌘 팔다리처럼 달고서”

진은영은 “이번 시집은 앞의 두 시집에 비해 구체적인 상황이 등장하고 직설적 화법이 두드러지는 것이 사실”이라며 “그런 게 내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때그때 자연스럽게 터져나오는 목소리를 억누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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