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그래 씨바, 행복해지고 말테다”

등록 2012-09-16 20:21

정도상 새 소설 ‘은행나무 소년’
정도상 새 소설 ‘은행나무 소년’
정도상 새 소설 ‘은행나무 소년’
치매걸린 할머니와 사는 고아 소년
어머니 유해지키려 철거 용역 맞서
존재 근거 뒤흔드는 상실 겪었지만
짝사랑 선생님 등 원군 만나 성장
정도상(사진)의 새 소설 <은행나무 소년>(창비)은 철거 예정지에 사는 고아 소년의 이야기다. 본명인 김우룡보다는 아명인 ‘만돌이’로 더 자주 불리는 소년은 부모님과 여동생을 교통사고로 잃고 포치동 천사마을에서 외할머니와 단둘이 산다. 그러나 재봉질로 생계를 유지하던 할머니 ‘희자씨’에게 치매가 찾아오고, 마을은 재개발을 위한 철거 바람에 휩싸여 뒤숭숭한데, 재개발을 담당하는 건설업자 큰아버지와 복음주의 교회 목사인 외삼촌은 만돌이 몫인 유산을 가로채고자 암투를 벌인다.

고아 소년의 성장담도, 재개발과 철거를 둘러싼 갈등도 아주 새로운 소재라고 할 수는 없다. 새롭기는커녕 모종의 ‘전형성’을 떠올리게 될 정도로 익숙하게 반복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작가는 주인공 소년을 화자로 삼고 짐짓 씩씩하며 발랄한 어조를 채택함으로써 진부하다는 느낌을 피하고자 한다.

“아 씨바, 좆도. 쩨쩨하게 담배 하나 갖고 때려, 때리긴.”/ “너 뭐라 그랬어? 야, 이 새끼 봐라? 아주 싹수가 노랗네.”/ “그러는 형은, 아니 아저씨는 뭐 꼬마 때 담배 안 피웠어?”

인용한 대화는 초등학교 졸업반인 만돌이가 앞집 청년 박정철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려다가 꿀밤을 맞고서 주고받은 수작이다. 만돌이는 툭하면 학교를 빼먹고 동네의 노는 중학생 형들과 어울리기도 하는 소년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쁘게 망가진 아이는 아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급식비를 내지 못하는 지혜를 괴롭히는 학교 운영위원장 아들 수만이의 머리를 식판으로 내리친 것은 불량기가 아니라 정의감의 발로였다. 평소 존경해 왔던 ‘갑빠’ 박정철에게 불량스러운 언사를 내뱉은 것도 그가 악덕 개발업자인 큰아버지의 똘마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서였다.

정도상
정도상
부모의 죽음에 이은 공동체의 붕괴, 그리고 점차 치매가 심해져 가는 할머니의 상태는 만돌이의 존재 근거를 근저에서부터 뒤흔드는 상실과 파괴의 힘들이다. 소년은 그것들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치러야 하지만, 그에게 원군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날 공부방 선생님으로 나타난 사진학과 여대생 여수경. 아이들에게 휴대용 디카를 나눠 주고 가족과 동네를 카메라에 담아 보라는 숙제를 준 수경을 만돌이는 짝사랑이자 첫사랑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런 만돌이를 ‘서방’이라 부르며 그림자처럼 쫓아다니는 사차원 소녀 지혜, 할머니를 연모하며 보살피는 침쟁이 할아버지, 주민들과 함께 철거 반대 투쟁을 벌이는 최 목사님과 하율 스님 등은 만돌이의 성장을 돕는 조력자들이다.

철거를 쉽게 하고자 동네에 불을 지르는 건설업체, 철거에 맞서 망루를 짓고 싸움을 벌이는 주민들, 그리고 망루에 불이 나면서 철거민 네 사람과 경찰 특공대 한 사람이 숨지는 사고 등은 최근 우리 사회가 목격한 아픈 사건들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이 재개발과 철거의 문제점을 다룬 르포나 고발문학으로 읽히기를 바라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망루가 불에 타고 경찰과 용역이 주민들을 짓밟는 장면을 뜻밖의 시적인 필치로 처리한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탄다. 얼어붙은 땅 위에서 몸을 구르지만 사람의 몸에 심지를 내린 불꽃이 너울너울 춤을 춘다. 죽음의 불꽃춤이다. 사람이 운다. 울음소리가 새벽하늘을 가득 채운다. 사람의 울음을 군화가 짓밟고 곤봉이 때리고 방패로 찍는다. 사람의 울음에 불이 붙는다.”

만돌이는 제 집 앞 은행나무에 나름의 바리케이드와 농성장을 만들고 철거 용역들에 맞선다. 나무 밑에 묻은 어머니의 유해를 지키려는 것이다. 소년의 안쓰러운 항거도 보람없이 은행나무는 동네 집들과 함께 뿌리뽑혀 사라지고 만다. 그럼에도, 그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놓아둔 화분에서 작은 은행잎 두 개가 올라온다는 결말은 희망의 여지를 열어 둔다. 그 어린 잎들은 만돌이를 대신해서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그래 씨바, 행복해지고 말 테다.”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선관위 “안랩 백신 무료 배포, 선거법 위반 아니다”
안철수 중심으로 헤쳐모여?
태풍 불어 배 떨어지면 농민 책임?
이방인의 ‘리틀 시카고’ 그곳에 사람이 산다
반미 시위 촉발시킨 동영상 제작자 “영화 만든 것 후회안해”
“집안일 많이 하며 죄악을 씻고 있어요”
[화보] 인혁당 사건 피해 유족들의 눈물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