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률 소설 <오래된 뿔>(전 2권, 은행나무)의 중심에는 한 장의 사진이 있다. “교련복 차림의 상고머리 고교생을 미제 콜트 45구경 권총으로 사살하는 사진”이다. 1980년 5월 광주에서 찍힌 이 사진은 사진 속 청년 박갑영의 죽음을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7년 뒤 그의 쌍둥이 형 갑수의 죽음을 초래하고, 또 다른 인물들의 목숨을 앗아가거나 삶을 뒤틀리게 만든다.
대전을 무대로 삼은 소설은 지역신문 기자인 박갑수의 의심스러운 죽음으로 문을 연다. 단골 카페에서 주인인 오 마담과 술을 마시던 그가 옆 탁자에 있던 깡패와 말싸움 끝에 칼에 찔려 절명한다. 그 사건이 있기 얼마 전 갑수는 지역 국회의원이자 대학 설립자의 아들인 장상구가 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 지휘관으로서 갑영을 비롯한 민간인들을 살해했다는 내용의 칼럼을 신문에 실으려다가 해직된 상태였다. 장상구 의원과 연결된 폭력배들이 갑수에 대한 협박의 말을 전한 바가 있었고, 갑수를 칼로 찌른 깡패는 그 폭력배들과 같은 조직 소속이었다. 정황상 장 의원의 살인 교사가 분명해 보였지만, 노회한 장 의원은 법망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며 권력과 경제적 이득이라는 기득권을 갈수록 공고히 한다. 그런 장 의원을 상대로 갑수의 신문사 동료 양창우 기자와 군 출신 두 사내가 갑수를 대신해 복수를 하고자 각개 약진한다.
<오래된 뿔>은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으로부터 7년 뒤인 1987년 6월항쟁에서 12월 대통령선거 사이의 기간을 주요 배경으로 삼아 시대의 상흔과 사회 지도층의 부패를 들추어낸다. 소설 속 현재인 87년과 그 ‘원죄’에 해당하는 80년을 수시로 오가면서 퍼즐을 맞추듯 범행의 배후와 배경을 쫓는 추리적 틀이 인상적이다.
갑수와 장상구, 오 마담과 두 사내 등 80년 광주를 온몸으로 겪은 이들이 주역이긴 하지만, 이 소설이 단지 80년 광주의 진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소설 속 현재인 87년과 소설 말미에 그려지는 2004년은 물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우리 사회 지배계층의 부패와 협잡을 실감나게 묘사한다. 국회의원이라는 권좌를 이용해 경제적 이득을 꾀하는 장상구, 언론을 무기 삼아 부당한 개발이익을 노리는 신문 사주, 권력자의 수족으로 구실하는 지역 깡패들, 심지어는 부패한 동료 기자를 감싸고 도는 신문사 노조 또는 운동 경력을 개인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는 학내 운동권 수장까지도 작가의 날선 비판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장상구의 부친 장근수가 악랄한 친일파였으며 갑수의 조부와 부친은 거꾸로 일제와 군사독재에 저항하다 희생되었다는 설정은 현재의 비극이 1980년이라는 가까운 과거는 물론 일제강점기에까지 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소설 말미에서, 결국 과거에 저지른 죄악이 들통난 4선 의원 장상구는 자신의 안위와 맞바꿀 비밀 자료를 빼돌려 차에 싣고 빠져나가려 하고 그의 차량을 갑수의 유복자인 민우와 양창우 기자가 차례로 몸을 던져 막으려 한다. “성난 황소의 뿔처럼….” 소설 전편을 통해 관찰자이자 탐구자로서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는 데에 주력했던 양 기자가 마지막 순간에 행동하는 인간으로 탈바꿈하는 것이 흥미롭다.
“포클레인 삽날이 흙을 쏟아 관을 덮었다. 묘혈이 덮일 때, 조객들이 여기저기서 애도했다. 다시 불어온 바람이 울음을 데려갔다. 박윤영의 울부짖음이 자꾸 그 끝을 낚아챘다.”
갑수의 주검을 묻는 장면을 묘사한 이 대목은 <오래된 뿔>의 문체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 간결하고 힘 있는 단문은 불필요한 감상을 배제하고 독자를 사건의 진행과 인물들의 동향에 직핍하도록 이끈다. 작가는 “젊은 독자들에게 광주 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려 주고 싶어 추리적 기법이라는 당의정을 가미했다”고 말했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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