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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9·11 테러뒤 나는 근본주의자가 되었다

등록 2012-12-09 20:18수정 2012-12-31 15:28

소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
‘아메리칸드림’ 가진 파키스탄 청년
조국까지 퍼진 전쟁공포에 생각바꿔
세계서 행동하는 미국 방식에 분개
‘문명·인종 갈등’ 작가 주제의식 담아

“텔레비전을 켰을 때 처음에는 영화가 나오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계속 보니까, 영화가 아니고 뉴스더라고요. 뉴욕 월드트레이드센터 쌍둥이 건물이 하나둘 무너지더군요. 그때, 나는 미소를 지었어요. (…) 누군가가 그렇게 가시적으로 미국의 무릎을 꿇렸다는 사실에 그랬던 거죠.”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왜 세기의 비극을 두고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일까.

파키스탄 출신 작가 모신 하미드(41)의 2007년 작 소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왕은철 옮김, 민음사 펴냄)의 주인공인 파키스탄 청년 찬게즈가 이 문제적 발언의 주체다. 찬게즈는 파키스탄 제2 도시인 라호르의 옛 시가지 식당에서 정체불명의 미국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찬게즈의 독백만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을 통해 명문 프린스턴대 유학생 출신으로 미국 유수의 감정 회사에 취직하고 백인 상류층 여성과 사랑에 빠졌던 그가 어떻게 해서 근본주의자 내지는 ‘테러리스트’가 되었는지가 드러난다.

찬게즈는 필리핀 마닐라로 출장을 갔다가 9·11 소식을 듣는다. 그는 학비를 손수 벌어가며 어렵사리 대학을 다녀야 했지만, 졸업하자마자 높은 연봉의 회사에 취직했고 같은 대학 출신인 에리카와는 연인 관계로 발전했다. 모두가 선망하는 아메리칸드림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듯했다. 그러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의 붕괴와 함께 그토록 자명하고 탄탄해 보였던 찬게즈의 아메리칸드림도 역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희생양을 찾고자 하는 미국의 분노가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하면서 이웃 나라인 찬게즈의 조국 파키스탄 역시 전쟁의 공포와 불안에 사로잡힌다. 두고 온 가족들의 안위에 대한 걱정은 찬게즈로 하여금 상황에 대한 전면적인 재인식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나는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확신이 없었어요. 뉴욕인지, 라호르인지, 아니면 양쪽 다인지, 아니면 어느 쪽도 아닌지 확신이 없었던 거죠.”

그런 그에게 업무차 만난 칠레의 출판인이 ‘예니체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스만 제국에 끌려가 이슬람 군대의 훈련을 받고 자신들의 출신지인 기독교 세계를 파괴하는 전쟁에 앞장섰던 소년들. 찬게즈는 자신이 현대판 예니체리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미국이 세계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내가 늘 분개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당신네 나라가 다른 나라 일에 계속 관여하는 건 참을 수 없었어요. 베트남, 한국, 타이완 해협, 중동, 그리고 이제는 아프가니스탄까지 말이죠. 미국은 우리 아시아 대륙을 둘러싼 갈등 대부분과 교착 상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어요. (…) 그런 지배의 과업을 돕는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한 건 옳은 일이었어요.”

결국 그는 안정적인 뉴욕의 직장을 포기하고 조국 파키스탄으로 돌아온다. 대학에 자리를 얻은 그는 “우리나라가 당신네 나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역설했고, 그의 강의를 들은 학생 하나가 미국인 국제기구 관계자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되면서 그 자신 이 정체불명의 방문객을 맞게 된 것.

“당신네들은 파키스탄인 모두를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라고 상상하면 안 돼요. 우리가 당신네 미국인들 모두를 변장한 암살자라고 상상하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죠.”

소설 마지막 대목에 나오는 찬게즈의 이 말은 그를 찾아온 미국인이 다름 아닌 ‘변장한 암살자’라는 사실을 반어적으로 확인시킨다. ‘찬게즈’(Changez)라는 그의 이름이 ‘칭기즈칸’을 닮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연정을 품었던 에리카(Erika)는 아메리카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아울러서 유념해 보면, 이 얄팍한 두께의 소설은 문명 및 인종 사이의 갈등이라는 무거운 주제의식을 담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로 옮긴 이 소설의 원제 ‘The Reluctant Fundamentalist’는 본의와 무관하게, 떠밀려서 된 근본주의자를 뜻한다는 사실을 또한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요컨대 근본주의는 문제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라는 것이 이 소설 제목에 담긴 내포적 의미라고 하겠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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