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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숫자 씨름하던 은퇴 경제관료, 문학 번역에 빠지다

등록 2013-10-21 19:04수정 2013-10-21 22:25

소설 ‘번역사’ 번역한 이윤재(63)씨
소설 ‘번역사’ 번역한 이윤재(63)씨
소설 ‘번역사’ 번역한 이윤재씨

27년 경제부처 요직 맡은뒤 명퇴
기업경영자 거쳐 번역가 ‘인생3막’
“혼자 힘으로 할 일 찾다가 눈떠
번역은 생각 퇴보막는 훌륭한 노동”
“나이가 들고 현직에서 물러나면 대개 과거의 경력에 기대서 소일거리를 찾게 됩니다. 어느정도 소득도 올리고 노후 생활의 안정에도 보탬이 되겠죠. 하지만 그다지 쓸모있는 경륜도 없는 터에 자리나 차지하고 있는 건 후배들에게나 사회 전체에 부담을 줄 가능성이 많아요. 저는 전부터 예순살에는 현역에서 물러나 뒤에서 조언을 하는 정도로 제 역할을 제한하자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면서 눈을 뜬 게 번역의 세계였죠.”

재정경제원 경제정책국장과 청와대 재정경제비서관을 지낸 정통 경제관료 출신 이윤재(63)씨가 번역가로 변신했다. 아프리카 수단 출신 여성 작가 레일라 아부렐라(49)의 소설 <번역사>를 번역해 내놓은 것이다. 대산문화재단의 ‘외국문학번역지원’ 공모 당선작이다. ‘대산세계문학총서’ 제119권으로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번역사>는 영국에 사는 수단 출신 무슬림 여성이 신앙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종교적·문화적 차이를 뛰어넘어 사랑을 이루는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서울대 법대 3학년이던 1972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경제기획원 사무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이윤재씨는 예산총괄과장,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비서실장, 재정경제원 경제정책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쳐 김대중 정부 초기인 1998년부터 이듬해 6월 명예퇴직 때까지 청와대 재정경제비서관을 맡아 외환위기 수습에 힘썼다. 동기들 중에서 늘 가장 먼저 승진하는 등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명예퇴직을 신청했을 때 주변에서는 크게 아쉬워하면서 만류하는 이가 많았다.

“계속 있었으면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할 수도 있었겠죠. 그렇지만 그 선택을 후회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당시는 외환위기 수습 때문에 정신이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쉰이라는 나이를 앞두고 여러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직생활은 쉰살까지만 하고 그 뒤에는 다른 일을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죠.”

잠시 숨을 고른 뒤 2001년 기업전략 연구·자문회사 ‘코레이’를 설립해 경영하던 그가 다시 그로부터 10년 뒤에 택한 ‘인생 제3막’이 바로 번역이었다.

“과거의 경력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 보니 번역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타인의 사유와 표현을 자기의 언어로 해석하고 옮기는 번역 작업이 저 스스로를 지적으로 끊임없이 긴장시키면서, 생활과 생각의 퇴보와 화석화를 막아 주는 훌륭한 노동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영어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했고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는 업무상 필요 때문에도 영어를 써야 할 일이 많았다. 공무원 신분이던 80년대 초 미국 스탠퍼드대학에 유학해 경영학 석사학위도 받았다.

“어찌 보면 공직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것 중 하나가 영어 능력인데, 그걸 어디에 써먹을까 궁리를 한 결과가 번역이기도 합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건 다른 세계에 대한 이해와 소통을 위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외국어가 젊은이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는 폭력이 된 것 같아요. 외국어로 된 텍스트를 누구나 손쉽게 접할 수 있게 하는 게 번역의 기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번역가로서 낸 첫 책 제목이 ‘번역사’라는 사실은 순전히 우연이겠지만, 그는 “번역가로 살라는 필연”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중고교 시절 6년 동안 학교 신문반을 거쳐 대학에서는 교양학부 학보 기자로 활동했던 그는 공무원 시절에도 ‘이상문학상작품집’이나 작가 이문열의 소설 등을 빼놓지 않고 읽었으며 구효서 소설 <비밀의 문>을 구입해 부하 직원들에게 건네기도 하는 등 문학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유지해 왔다. 앞으로도 고전 영문학 작품과 인문·사회과학 책들을 번역하고 싶다고 했다.

“문학은 매우 중요한 분야입니다. 특히 공무원들에게 문학 독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게 사람에 대한 이해 아니겠습니까? 물론 직접 만나서 대화하거나 언론 보도를 통해서도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겠지만, 그런 것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문학작품을 읽음으로써 자신의 사고를 확장하고 다른 세계와 다른 삶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요.”

문학에 대한 관심의 궁극은 창작일 텐데, 그에게 마지막으로 창작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창작에 관한 꿈은 누구나 지니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저는 외환위기 당시 정부 고위직에 몸담고 있던 사람으로서 국민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 준 데 대한 일종의 반성문을 쓰는 게 먼저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일단은 번역 작업을 더 부지런히 하고 싶고요.”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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