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필 10년 만에 소설집 <혀끝의 남자>를 낸 백민석. “사람들은 왜 종교에 끌리나 하는 것이 요즘 내 관심사다. 지금 쓰는 장편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려 한다”고 말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작가를 죽이고 나머지를 살려”
15년전 인도 여행 경험 소설화
종교와 신에 관한 문제에 천착
15년전 인도 여행 경험 소설화
종교와 신에 관한 문제에 천착
백민석 지음
문학과지성사·1만2000원 백민석이 돌아왔다! 2003년 장편 <러셔>와 경장편 <죽은 올빼미 농장>을 낸 뒤 신작을 발표하지 않는 것은 물론 문단과 연락을 끊은 채 ‘잠적’했던 그가 세번째 소설집 <혀끝의 남자>를 들고 10년 만에 복귀했다. “작품이 갈수록 엉망이 되는 것 같았어요. 작품과 내가 같이 망가져 간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문학적 고민에 우울증이 더해지면서 문학판을 떠난 거죠. 이렇게 돌아올 생각도 없었는데, 출판사 쪽의 연락을 받고 몇 번 만나고 하다 보니 다시 시작해 보자는 의지가 생기데요.” 지난 27일 생애 첫 기자간담회에 나온 백민석(42)은 “소설을 다시 써 보니까 예전 전업작가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라며 “우울증도 다 치유됐다. 이렇게 웃고 있지 않나?”라고 말했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5년 <문학과사회>를 통해 등단한 백민석은 분노의 에너지를 폭력적으로 내뿜는 소설들을 통해 개성 가득한 세계를 구축했다. 비록 다수 독자의 사랑을 얻지는 못했지만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가령 김사과나 최진영 같은 후배 작가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된다. 소설집 <혀끝의 남자>에는 아홉 단편이 묶였는데 이 가운데 표제작과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이 신작이다. 특히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은 절필할 당시의 정황을 솔직하게 담고 있어 ‘소설로 쓴 작가의 말’로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나는 이미 작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내팽개치다시피 하고 있었다. 청탁받은 원고는 초고 상태로 검토도 없이 그냥 넘겼고 문예지가 나왔어도 다시 읽지 않았다. 신간이 나와도 출판사에 들러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문학을 그만둔 이유가 ‘살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십 년 전 글쓰기를 그만두면서 나는 내 삶의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때 우격다짐으로 글쓰기를 계속했다면 더 많은 것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 당시 나는, 작가로서의 나를 죽였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의 나머지를 살게 했던 것이다. 나를 계속 살게 했던 것이다.”(<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 역시 신작인 표제작 <혀끝의 남자>는 십오년 전 인도 여행 경험을 소설화한 작품이다. “나는 혀끝의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머리에 불을 이고 혀끝을 걷고 있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작가의 최근 관심이 종교 쪽으로 쏠려 있음을 알게 한다. 다리 한쪽이 꺾이고 등은 굽었으며 팔 하나도 휘어진 ‘구겨진 검은 소년’의 모습 그리고 그런 비참과 가난의 한켠에서 갖은 쾌락과 악행에 몰두하는 여행자를 보면서 화자 ‘나’는 이렇게 쓴다. “어쩌면 나는 혀끝의 신을 본 것일 수도 있다. 남자도 여자도 인간도 아니라면 방금 내 혀끝에서 태어난 신일 수도 있다. 일억이나 되는 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오 분 전에 내가 새로 구워낸 신일 수도 있다. 신이라면 나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내 혀끝이 종교의 발상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 그러니 이제 모든 것은 다시 씌어져야 한다.”(<혀끝의 남자>) 소설집에 실린 <폭력의 기원-작은절골에서>는 서울 무악재 북서쪽 산동네에서 보낸 유년기를 돌이킨 자전소설이다. 가난과 폭력이 일상화한 성장 환경은 백민석 소설의 ‘폭력의 기원’을 알게 한다. <일천구백팔십 년대식 바리케이드>는 안양천 지천 산책로에 어느 날 문득 나타난 물건들을 통해 지금은 잊힌 80년대 노동자 투쟁의 함성을 되살리고자 한다. 이와 함께 <재채기>라는 작품에서도 최루탄과 화염병의 시절이 희미한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지금 작가들은 ‘쎄게’ 쓰고 싶어도 이런저런 눈치를 보느라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문학상이 많이 생긴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나는 누가 뭐라든 전에 했던 대로 ‘쎄게’ 나가려 한다.” 27일 간담회를 마무리하면서 토로한 백민석의 각오가 반갑고 듬직하게 들렸다.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