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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종간…휴간…시 전문지들의 추운 겨울

등록 2013-12-08 19:57

10년 넘게 발행돼 온 중견 시 전문지들이 재정 적자를 견디지 못해 속속 간판을 내리고 있다. 사진은 영화 <시>에서 주인공 윤정희가 원고지에 시를 쓰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0년 넘게 발행돼 온 중견 시 전문지들이 재정 적자를 견디지 못해 속속 간판을 내리고 있다. 사진은 영화 <시>에서 주인공 윤정희가 원고지에 시를 쓰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시평’ ‘시안’ ‘시인세계’ 등
중견 시 잡지들 발행 중단
비용 충당 못해 적자 누적


<시평> 2013 겨울호(왼쪽부터), <시안> 2013 가을호, <시인세계> 2013 가을호.


“첨예한 장르가 문명의 무덤이 되고 시의 언어가 광속의 감각에 밀려났다. <시평>은 길을 찾지 못했다. 꿈과 현실의 갈등을 보여주던 촉수들은 잘려나가고 수렁 속에서 꽃이 되지 못하고 한 시인도 갇히고 말았다.”

근착 시 전문지 <시평> 말미에 실린 ‘편집 후기’에 이 잡지의 발행을 맡아 온 고형렬 시인이 쓴 말이다. 2000년 가을호로 창간했던 <시평>이 통권 54호로 종간하게 되었노라고 그는 밝혔다. “잡지를 통한 시 창작, 낭독, 비평, 여행, 교류 등의 문사(文事)가 여기서 중단하게 된 것은 몸을 자르는 일과 같이 아프다”며 “이 문제는 발행인과 재정에 있다”고 설명했다.

‘시인들이 함께 만드는 시 잡지’를 표방했던 <시평>은 특히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 여러 나라 시인들의 작품 역시 번역해 싣는 등 많은 시 잡지들 가운데서도 독자적인 개성을 확보해 왔다. 고형렬 시인이 밝힌 바로는 그동안 모두 340여명의 아시아 시인들 작품이 이 잡지를 통해 한국 독자와 만났다. 한국과 다른 아시아 시인들은 작품 교류뿐만 아니라 합동 낭독회와 여행 등을 통해 우의를 다지고 문학적 자극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누적된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잡지는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시평>만이 아니라 최근 10년 남짓 역사를 쌓아 온 중견 시 전문지들이 속속 간판을 내리고 있다. 1998년 가을호로 창간했던 <시안>과 2002년 가을호로 창간했던 <시인세계>가 지난 가을호로 나란히 종간 또는 휴간했다. 1989년 가을호로 창간해 이번 겨울호로 통권 92호에 이르게 된 <시와시학> 역시 통권 100호로 종간할 계획으로 알려졌다. 시 전문지들에 추운 겨울이 몰아닥친 것이다.

남부럽잖은 역사와 전통을 쌓고 영향력도 확보한 시 잡지들이 잇따라 발행을 중단하는 가장 큰 까닭은 역시 재정 부담에 있다. 잡지 한 호를 내는 데 적게는 1000만원에서 많게는 3000만원까지 드는데 잡지 판매 수익과 광고료로 그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적자가 쌓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시안>을 발행해 온 시인 오탁번 고려대 명예교수는 “현직(대학교수직)에 있을 때는 광고를 유치하기도 쉬웠고 급할 땐 월급을 털어 넣기도 했지만 정년퇴직한 뒤에는 여러모로 힘에 부쳤다”고 말했다.

<시인세계> 발행인이었던 김종해 시인 역시 “잡지의 모태인 출판사 문학세계사의 경영 사정이 좋으면 적자를 감수하면서도 잡지를 내겠는데 최근엔 출판사부터가 형편이 어려워 일단 휴간하기로 했다”며 “형편이 나아져서 속간한다면 전보다 한층 긴장된 시 세계를 펼쳐 나가는 쪽으로 면모를 쇄신하려 한다”고 말했다.

종간 및 휴간한 시 잡지들의 호당 평균 발행부수는 1000부 남짓인데 그 가운데서 정기독자와 서점 판매 등으로 팔리는 것은 500부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판매수익이 원고료를 충당하기에도 태부족인 현실인 것이다. <시와시학> 발행인인 김재홍 경희대 명예교수는 “투고된 원고를 싣는 동인지 형식 또는 신인상 수상자에게 잡지를 몇백부씩 떠넘기는 식으로 운영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적정한 원고료를 지급하면서 양질의 잡지를 내기란 정말 힘들다”고 토로했다. 오탁번 교수도 “대한교과서라는 튼튼한 출판사가 발행 주체인 <현대문학>처럼 뜻있는 기업이나 문화재단에서 좋은 시 잡지를 내 주는 게 바람직해 보인다”고 말했다.

<시평> 발행인 고형렬 시인과는 며칠째 연락이 닿지 않았고, 종간호의 표제작으로 실린 작고 시인 박영근의 <서시>가 그의 심정을 대신 전하는 것 같았다.

“가다가 가다가/ 울다가 일어서다가/ 만나는 작은 빛들을/ 시라고 부르고 싶다.//(…)// 때때로 스스로의 맨살을 물어뜯는/ 외로움 속에서 그러나/ 아주 겸손하게 작은 목소리로/ 부끄럽게 부르는 이름을/ 시라고 쓰고 싶다.”(<서시> 부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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