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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자살 논쟁과 죽음의 윤리

등록 2014-03-16 20:19

자살의 역사
조르주 미누아 지음, 이세진 옮김
그린비·2만9000원
중세부터 18세기까지 서양 사회에 나타난 자살과 그에 대한 논쟁을 다뤘다. 특히 자발적 죽음에 대한 성찰과 격론이 이어졌던 16~18세기에 대한 정교한 분석을 시도한다. ‘자살’이라는 단어가 17세기 영국에서 등장하기 전까지 유럽인들은 ‘자기 살해’라는 말을 썼다. 신조어에는 자살과 타살을 구분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담겨 있었던 셈이다.

자살에 대한 단죄는 348년,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시작했다. 기독교 교회는 종파 갈등 끝에 자발적 죽음을 규탄하는 결정을 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차없이 금지한 자살은 그 뒤 교회의 공식 입장이 됐다. 교회와 세속 권력은 노동력과 신자 확보를 위해 ‘자살 탄압’에 협력했다. 스스로 죽은 서민들은 재산몰수형과 신체모독형을 받았지만, 기사와 귀족들은 사냥·결투·전쟁처럼 ‘사실상 자살’인 대체물을 이용하기도 했고, 명백한 자살을 눈감아주는 혜택도 누렸다. 가난한 백성의 자살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수백년 동안 꾸준히 멸시당했다.

16세기 말 르네상스에 이르러 자살에 대한 사유에 중대 변화가 생겼다. 1600년, 셰익스피어가 결정적으로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인간 조건의 부조리에 대한 충격적인 질문을 던졌다. 17세기 언론과 통계가 발달하고 사망 내역이 실린 신문이 발간되면서 ‘영국병’이라 일컫는 자살 관련 담론이 폭증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살이 늘어났으며, 언론은 인생사의 비극을 다뤘다. 비로소 자살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가 거론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 철학자들은 “사느냐 죽느냐”라는 물음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18세기 몽테스키외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자살의 이유를 분석하고 ‘자살 탄압’에 반대했다. 1773년 동성 연인으로 추정되는 병사 두명이 인생의 부조리를 역겨워하는 유서를 남기고 죽었다. 이런 철학적 자살은 계몽주의 사상, 합리적 인간의 자유와 연관돼 눈길을 끌었다. 동시대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파우스트, 베르테르의 이야기로 자살 탐구에 불을 지폈다. 데이비드 흄은 “자살이 신, 이웃, 우리 자신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8세기 엘리트들이 자살 논쟁을 하는 동안 집권층은 눈에 띄는 억압보다 숨기고 쉬쉬하는 ‘자살 터부’를 완성시켜 나갔다. 자살은 나약한 정신, 도덕적 일탈, 사회의 질병으로 취급됐고 19세기엔 구조화된 터부가 승리를 거두며 자살 논쟁이 끝났다. 지은이는 이처럼 억압당한 자살 논쟁은 안락사 문제 때문에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고 강조한다. ‘삶의 부조리’는 받아들이되, 논쟁을 억압하고 자유를 검열하는 일은 명백한 퇴행이라는 것이다. 생명 윤리만큼 죽음 윤리에 대한 토론이 이어져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는 자살 방조가 아니라 진정 인간적이고 존엄한 삶에 뿌리박은 질문이라는 것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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