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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색(꽃)즉시공(절)으로 지은 ‘시집’

등록 2005-09-08 18:45수정 2005-09-09 14:22

이홍섭 시집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이홍섭 시집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
이홍섭(40)씨의 세 번째 시집 <가도 가도 서쪽인 당신>(세계사)을 꽃과 절의 시집이라 하자. <헌화가> <오동꽃> <목련>처럼 꽃을 소재로 한 시들, <용문사 부근> <심우도> <겨울 안거>처럼 절과 불교적 맥락을 지닌 시들이 여럿 보이기에 하는 말만은 아니다. 겉보기에 꽃이나 절과 무관한 듯한 작품들 또한 명백하게 또는 암암리에 꽃과 절의 이미지와 이어져 있다는 뜻이다. 가령 <돌의 초상>이라는 시에서 시인이 “나는 기억한다/내 몸에 새겨진 혼돈의 무늬들”이라 쓸 때, 여기서의 ‘무늬’는 갈 데 없이 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무늬=꽃의 내용을 좀 더 부연한 것이 다음 연의 “내 몸을 스쳐간 수많은 사랑과 이별/자기를 사르며/사라지던 별들의 비명”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런 점에서라면 “그게 고통인 줄도 모르고/눈부신 햇살 속으로 솟구쳐 오른”(<은어>) 한 마리 은어 역시 꽃의 변형이라 할 수 있겠다.

절은 어떨까. 여기 우는 목탁과 우는 양파가 있다.

“어금니를 꽉 문 채/눈물도, 서러움도 기어이 떨쳐버리겠다고//모질게, 모질게도 우는 목탁”(<북극성>)

“오늘은 식탁 위에서 양파가 운다/나를, 너를, 집을, 사랑을/한 겹 한 겹 벗어던지며 운다/둥글게 둥글게 운다//다 벗으면/너도, 나도, 집도, 사랑도/이 서러운 식탁도/여기에 없을 것이다//양파가 뼈저리게 운다”(<양파>)

껍질이 차례로 벗겨져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양파의 속성에서 ‘공()’이라는 불가의 가르침이 연상되지 않는가. 그렇다면 ‘떨쳐버리겠다고’ 우는 목탁의 속성 또한 ‘공’을 향한 몸부림이라 할 수 있을 테다. ‘공’으로서의 절에 대비해 보자면 꽃은 곧 ‘색()’인 것. 문제는 목탁과 양파가 모질게 또는 뼈저리게 울고 있다는 현재형의 사태다. 목탁과 양파의 울음은 앞서 언급한 돌=꽃의 비명 및 은어=꽃의 고통과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총괄하자면 절과 꽃이 길항하며 나름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이 시집의 세계라 하겠다.

“함부로 꽃을 든 죄/천지에 사무쳤으니”(<초혼>), “하루에도 열두 번/절간을 지었다 허물며/여기까지 왔다”(<용문사 부근>).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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