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동포 전학문 (78)씨
‘일본 침략정신…’ 펴낸 전학문씨
소련 과학자 출신 사할린 귀국동포
일제 잔혹 실상과 한인 운명 ‘논증’
“통일돼 만주·연해주 이어졌으면”
소련 과학자 출신 사할린 귀국동포
일제 잔혹 실상과 한인 운명 ‘논증’
“통일돼 만주·연해주 이어졌으면”
“평생을 자연과학자로 살아온 나는 전문적인 역사 연구자는 아니지만, 호전적인 사무라이 근성에서 비롯된 일본의 침략주의가 내 조상과 부모님 같은 사할린 동포들을 강제징용해 비참한 운명 속에 처박은 야만적인 사실을 귀납법적 원리에 근거하여 일관되게 묘사할 목적으로 이 책을 썼다.”
2009년 3월 영구 귀국한 사할린 동포 전학문(78·사진)씨가 <일본 침략정신과 사할린 한인의 숙명>(나라원 펴냄)을 쓴 이유다. 1936년 사할린 남부 탄광마을 텐나이에서 석탄 채굴 광원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레닌그라드 국립종합대학에서 토양미생물학을 전공한 첫 한인 박사로서 소련 과학아카데미 산하 물·생태학연구소 부소장을 지냈다.
토양미생물군 형성과 안정화합법, 미생물농법, 가시오갈피 연구, 중국 사막화 방지 공법 개발 등의 업적으로 상도 받고 한국·일본 기업의 기술고문으로도 일한 전씨는 영주 귀국 뒤 “사할린 한인의 비참한 숙명과 관련된 일본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한인 비운의 전제가 되는 일본의 잔혹한 침략 및 제국주의 전쟁사에서 특징적이고 에피소드적인 사건들을 골라내고 스스로 체험한 사실들을 덧붙이고 논증”한 끝에 그는 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책은 전씨 나름의 시각으로 간추린 일본 약사와 ‘일본 침략정신의 (역사적) 배경’, 징병노동자 학대·학살 사건들과 731부대 등의 조선·중국인에 대한 만행 사례들, 일본인의 성격 특성, 일본 패전 뒤 사할린 동포들의 실상 등을 담고 있다. 마지막에 ‘일제강점기 용궁 전씨 후손의 숙명’을 덧붙인 것은 이 책이 전씨 자신의 정체성 확인이자 후손들에 대한 유언임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의 침략정신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그는 말했다.
경북 의성군 비안면의 용궁 전씨 집안 출신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의 부모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지주들에게 땅과 집마저 빼앗겨 빈털터리가 된 뒤 홋카이도 구시로 탄광을 거쳐 자식들과 사할린으로 갔다. “일제는 채탄작업에 대한 경험과 능력이 있고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부친과 백부를 국가총동원령이 실시되기도 전인 1935년 사할린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사할린 탄광 개발에 경험 많은 조선인 광부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7만여명의 조선인이 사할린으로 끌려갔다. 그들의 90% 이상이 남한 출신이다. 그 가운데 4만여명은 일제의 패전 뒤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무국적자가 된 채 반세기가 넘도록 고향 땅에 돌아올 수 없었다. 일본 정부는 그때 우편저금 형태로 압류한 조선인 노무자 1만6000여명의 저축액 1억8700만엔(현재 가치로 약 4조4506억원)을 “가입자들 통장 원본이 없다”는 이유로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다.
소련 붕괴 뒤 “지금까지 4000여명의 1, 2세들이 돌아와 전국 20개 단지에서 살았고, 그 가운데 1000명 가까이가 이미 세상을 떠났다.” 지금 그는 60가구가 입주한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의 귀국 사할린동포 거주단지에서 교사 출신 부인(72)과 살고 있다.
통일이 되면 한반도와 만주, 연해주와 사할린이 모두 하나의 경제생활권이 될 것이라는 전씨는 “문제는 북한”이라며, 남북관계의 변화를 고대했다. 그리고 “총련 계통이라는 이유로 한국 방문을 사실상 막고 있는 조선적(북한 국적 아님) 재일동포들의 방문을 다시 허용해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글 한승동 기자 sdhan@hani.co.kr
사진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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