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서점에서 여성들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를 보고 있다. 시공사 제공
<사랑은 왜 불안한가>
에바 일루즈 지음·김희상 옮김
돌베개·9800원 지난해 6월 이후 10개월 동안 국내에서 ‘감정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책이 4권이나 출간 또는 재출간됐다. 현대의 불확실성과 사랑이라는 감정의 변화를 집요하게 분석해온 그의 이론이 한국 사회에서 어느 정도 호응을 얻어내고 있다는 방증인 셈이다. <사랑은 왜 불안한가>는 일루즈의 최근 저작으로, 130여쪽의 간소한 분량이지만 지금까지 일루즈 이론의 핵심을 간명하게 설명한다. ‘엄마 포르노’란 별명이 붙은 이엘(E.L.) 제임스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국내판: 시공사) 시리즈가 분석 대상이다. 소설 내용은 사랑 아닌 섹스만 추구하던 부호 남자 그레이와 피억압자 아나스타샤의 관계가 서서히 역전되면서 진정한 사랑이 완성된다는 전형적인 연애담이다. 시리즈는 2012년 미국에서 나온 뒤 올해 초까지 세계적으로 1억권이 넘게 팔려나갈 정도로 여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지은이는 이 ‘메가히트’ 소설이 현대 여성의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어떻게 충족시키며, 불안한 사랑과 섹스의 해결책까지 완벽하게 제시했는지를 풀이한다. 가질 것 다 가진 남자의 권력과 별것 없지만 남자에게 결코 굽히지 않는 여자의 자율성은 서로 끊임없는 욕구를 창출해 섹스 판타지로 나아간다. <인정 투쟁>을 쓴 악셀 호네트의 영향을 받은 학자답게 일루즈는 사랑의 관계를 힘들게 만드는 핵심이며, 관계의 불안을 획책하는 요인으로서 ‘인정’의 문제를 중요하게 거론한다. 남녀는 신분, 소유, 교양, 미모의 무한경쟁을 벌이고 있으며 현대는 이런 끝없는 불안 때문에 상대에게 인정받으려는 욕구가 그 어느 때보다 큰 시대라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 여자’인 여주인공의 ‘성격’은 다른 여자들의 성적 매력을 누르고 사랑에서 승리한다. 이 구태의연한 메시지 속에 독자들은 환상적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감정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
19금 ‘그레이의 50가지…’ 분석
완전한 사랑은 단지 소비될 뿐 남자가 지배하는 사도마조히즘적 관계를 강조하는 <그레이…>는 반페미니즘 소설이 아니라 오히려 페미니즘의 코드를 녹여두었다고 일루즈는 강조한다. 여주인공은 누구보다 강인한 의지력과 자기주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레이의 남성적인 모습을 통해 자율적이지만 보호받고 싶어하는 모순적인 여성의 판타지를 함께 충족한 것으로 분석된다. “남녀 평등은 그다지 섹시하지 못하다”며 안정적인 감정의 결속을 원하는 여성들의 반감이 곧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며 페미니즘의 미완성을 반증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루즈는 이 소설을 통해 여자들이 페미니즘의 평등과 자율이라는 정치적 문제를 벗어던진 채 홀가분하게 에로스의 쾌락만을 선물받게 되었다고 본다. 침대 위의 사도마조히즘적인 불평등은 하나의 유희일 뿐, 남녀의 권력 관계나 평등의 문제와도 무관해 정치적 부담이 없다. 그야말로 여자들이 가진 모든 판타지를 정교하게 충족시키는 장치다. 1억권 판매의 원동력은 ‘성평등’과 ‘낭만적 사랑’이라는 여자들의 모순된 희망을 동시에 만족시키고, 인정 투쟁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사랑과 불안을 가학과 피학적 행위로써 해결하는 기괴한 줄거리 덕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레이…>가 “조악한 문학”이며 “오늘날 우리의 성생활과 애정생활이 어떤 지경에 처해 있는지 똑똑히 보여준다”고 매듭짓는다. 이 책은 또한 소설이 가진 자기계발서의 성격에 눈길을 준다. 여성 독자들은 소설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성인용품 세트를 사들였고, 실제 성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 나섰기 때문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나 여성 잡지 등에서 보듯, 섹스 문화나 여성의 감정 문화는 자기계발 상품이 된다. 이러한 자기계발의 상품화는 심리치료학, 그리고 2세대 페미니즘과 관련됐다는 것이 일루즈의 주장이다. 페미니즘이 자율적 여성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감정을 관리·통제·행동할 수 있다는 관념을 만들어 경제와 감정이 상호작용하면서 서로를 구성·강화하는 ‘감정 자본주의’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감정 자본주의>). 일루즈가 ‘사랑’과 ‘섹스’에 몰두하는 것은 이 문제가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 질서를 조직하는 한 축으로서 사회학의 핵심 주제가 되기 때문이다. 그는 악셀 호네트의 제안으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아도르노의 강의를 맡으며 아도르노부터 하버마스를 거쳐 호네트까지 이르는 비판사회학 이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바 있다. 또 베버의 전통에 따라 ‘자유와 평등을 성취했느냐’의 여부가 사회 변화에 대한 평가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대신 평등이나 자유 같은 새로운 규범이 친밀한 관계의 감정적 질감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관심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레이…>를 증거 삼아 일루즈가 자신의 감정 사회학 이론을 증명하려는 시도로 읽히기도 한다. 불안한 사랑과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후기 근대의 욕구는 허망하고, ‘완전한 사랑’은 소비될 뿐 현실에서 달성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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