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평전>을 쓴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산은 공정과 청렴으로 썩어 문드러진 세상을 치유하려던 실천 지식인”이라고 말했다.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정약용 평전’ 낸 박석무 이사장
목민심서에서 공직자 윤리와
재해민 돌보는 국가 책무 강조
저항권 일깨운 실천적 지식인
목민심서에서 공직자 윤리와
재해민 돌보는 국가 책무 강조
저항권 일깨운 실천적 지식인
박석무(72)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산 정약용(1762~1836) 연구의 권위자다. 13·14대 국회의원으로 일할 때조차 정부에 “목민관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호통쳤고 국회 안에 다산사상연구회를 만들기도 했다. 이번에 쓴 <다산 정약용 평전>(민음사)은 박 이사장이 공저를 포함해 12번째로 펴낸 다산 관련 서적이다.
24일 서울 중구 순화동 다산연구소에서 만난 박 이사장은 “10년 전 낸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를 쓰면서 아쉬웠던 사상 설명을 대폭 보강하고 후대 평가를 종합적으로 모아 마음의 짐을 덜었다”고 했다. 2004년 사단법인 다산연구소를 개설해 ‘풀어쓰는 다산 이야기’를 800회 넘게 보냈고, <여유당전서>를 펴보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몰두했다. 이 평전도 초고만 원고지 2600쪽에 이른다.
10년 전 책이 기행문 형식이라면, 평전에는 다산의 ‘실천 철학’을 더 섬세하게 보여준다. 유년 시절부터 말년에 이르기까지 다산의 일생을 네 시기로 나누어 설명했고, 정조와 개혁 공조의 발목을 잡은 당쟁과 정약전·정약종·정약용 형제를 죽이거나 귀양 보낸 천주교 박해에 대한 맥락적 풀이, 노론 이론가들과도 남몰래 철학적 논쟁을 벌이고 지식을 쌓아올려간 지식인의 면모도 보여준다.
“독서백편의자현이라. 50여년 읽으니 비로소 다산 사상의 정수가 보였다. 문과합격을 하면서 ‘공렴원효성’(公廉願效誠), ‘공정과 청렴으로 정성 바치기를 원하노라’는 시구절을 썼다. 이것이 다산 사상의 핵심이다. 다산이 바라던 이상 국가도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이었다.”
공렴은 공정과 청렴이라는 뜻이다. 조선 후기 삼정(전정·군정·환곡) 때문에 고통받는 백성의 참상을 눈으로 보고, 썩어빠진 세상을 개탄하며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고 다산은 <경세유표> 서문에 썼다. 이런 인식 아래 자신을 닦고 국가를 통치하는 방법을 궁구한 것이 500여권에 이르는 다산의 저작들이다.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원대한 국가 개혁 이론을 담은 <경세유표>를 먼저 쓰다가 놔두고 <목민심서>를 지었다. 18년 동안 유배를 가 있어 국가 개혁을 실현할 처지가 아니기도 했고, 바꾸기 어려운 법·제도를 놔두더라도 공직자가 먼저 윤리를 회복한다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다산은 232권에 이르는 경학 해설서를 썼다. 평전의 관련 내용을 종합하면, 다산은 고고한 이론만 강조하는 사서육경의 잘못된 해석 때문에 세상이 병들었다고 보았다. 경학 해설은 성리학의 이론을 빼고 행동철학이자 실천적 학문으로 경을 재구성하려는 다산의 기획이었다. 자기를 다스리는 수기학, 세상을 다스리는 경세학을 합쳐서 인간의 심성을 회복한 뒤 공직자가 공렴에 따라 집행하면 법·제도를 뒤집지는 못하더라도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고 상상했던 셈이다.
“수많은 저작 중 하나를 고르라면 <목민심서>다. 그는 애민정신이 투철했다. 그 시절에 노인, 유아, 중병자, 장애인, 재난당한 사람을 국가가 돌보는 강력한 복지를 강조했다. 보편적 복지에 가깝다.”
그밖에도 다산은 획기적인 제안을 많이 했다. 37살의 논문 <전론>에서 공동 노동을 통해 소득과 분배를 공평하게 하고 부자의 재산을 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보태는 ‘손부익빈’의 주장을 담은 ‘여전제’를 주장했다. 그 뒤 <경세유표>에서 실현 불가능한 전제를 수정해 노동량에 따른 분배를 하자고 ‘정전제’로 수정된 제안을 한다. <탕론>은 천자(임금)도 상향식 간접선거로 뽑자는 주장이다. <원목>에서도 ‘백성의 뜻을 배반하는 통치자는 존재할 수 없다’는 위민사상을 힘주어 말했다. 박 이사장은 “임금이라도 문제가 있다면 언제든 퇴출시키고 다시 선출해야 한다는 민주정치, 국민저항권의 개념을 담은 의심할 바 없는 인류 역사의 위대한 선진사상”이라고 분석한다.
“물론 한계가 있다. 며느리들이 게으르면 쫓아내도 좋다고 하고, 아들 둘에게만 편지를 쓰는 등 남존여비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외 선조인 고산 윤선도처럼 유려한 한글 시는 한편도 없다. 국가사회발전 개혁 주체를 군왕으로만 보면서 주자학과 유교주의의 틀을 깨지 못했다. 하지만 바닥에 깔린 뜻은 상당히 변혁적이었다. 개혁가, 진보적 사상가, 실천적 지식인이다. 그걸 깔아뭉개선 안 된다.”
박 이사장은 1973년 유신체제에 반대한 전남대 <함성>지 사건으로 복역한 뒤 모두 2년 반 정도 옥고를 치렀다. <여유당전서>도 감방 안에서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친구 시인 김남주는 옆에서 사회과학서적이 반입되지 않는다며 아우성이었지만, 한자 책은 반입이 자유로워 맘대로 볼 수 있었다”고 웃었다. 그가 내민 <여유당전서> 앞쪽에는 ‘번호 998번, 성명 박석무, 교부일 1981년 2월24일’이 뚜렷하게 인쇄된 열독허가증이 아직도 붙어 있었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 지금 세상은 좋은 학벌, 돈, 권력에만 관심이 있다. 공무원은 ‘공렴’을 상실하고 학교는 돈벌이가 안 되고 효용성이 없다며 기초학문을 저버린다. 나라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공렴이 없다면 한국 사회의 난제는 거듭된다. 세월호 사건 같은 난제를 두고 통쾌한 비판으로 끝나선 안 된다.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다산이 필요한 이유다.”
박 이사장은 다음 작업으로 “<목민심서>를 현대인이 읽기 좋도록 만들어 펴낼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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