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다섯번째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을 내놓은 이문재 시인은 “문학의 공공성, 사회적 상상력을 회복해야 한다”면서도 “독자의 감성을 일깨우는 것이 시의 근본적인 정치성”이라고 강조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지금 여기가 맨 앞>
이문재 지음
문학동네·8000원 “나무는 끝이 시작이다./ 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 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 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 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 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지금 여기가 맨 앞> 부분) “죽음은 살아 있어야 한다./ 죽음이 삶 곁에 살아 있어야 한다./ 죽음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삶이 팽팽해진다. 죽음이 수시로 말을 걸어와야/ 살아 있음이 온전해진다.”(<백서 2-죽음은 살아 있어야 한다> 부분) 이문재의 다섯번째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에는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반어적 진술이 수다하다. 끝이라 생각했던 지점이 시작이 되고 죽음은 살아 있는 어떤 것이 되며 삶은 죽음 덕분에 비로소 삶다운 삶이게 된다. 이런 진술들은 단순한 말장난이나 기발한 착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곱씹어 볼수록 적확하고 심오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노자 <도덕경>에 이르기를 ‘바른말은 마치 반대되는 것 같다’(正言若反)고 했거니와, 이문재의 시들은 그런 점에서 도가적이라 할 법하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사막>)라는 문장은 어떤가. 역시 <도덕경>에서 ‘찰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 때 그 무(無)가 있어야 그릇으로서 쓰임이 있다’는 대목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반어적 진술에 적확한 진실
자유와 고독과 느림의 가치 이문재의 시를 도가적이라 할 때, 그것은 역설과 반어 그리고 모순 속의 합일이라는 노자의 방법론만 받아들였다는 뜻은 아니다. <도덕경>의 핵심 메시지인 무위자연의 세계관-또는, 사회학자 김홍중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감(感)-을 통해 “다른 삶, 다른 세계를 상상”(‘시인의 말’)한다는 주제의 측면에서도 이 시집은 도가적이라 할 만하다.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고/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자유롭지만 고독하게> 부분) “느린 것은 느려야 한다, 느려져야 한다고 다짐하는 내 마음뿐, 느림, 도무지 느림이 없었습니다, 자유로운 자유가 없는 것처럼, 정말 느린 느림은 없었습니다.”(<정말 느린 느림> 부분) 세속의 번다와 훤소를 벗어나기 어려운 필부에게 자유와 고독과 느림이라는 가치는 다만 지향과 회한으로써만 잠깐 엿볼 수 있는 경지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시인은 그 아득한 경지에 이르기를 앙망하며 기도를 통해 그에 다가가고자 한다. “내가 먼저 저 한 점에다 죄다 꺼내놓았으니/ 죄보다 독했던 오해에서 치명적이었던 무관심까지/ 본능보다 깊숙했던 욕심까지 다 끄집어내 불태웠으니/ 나였던 모든 것을 바치고 무릎 꿇었으니”(<자작령> 부분)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오래된 기도> 부분) <오래된 기도>에도 오른손을 감싼 왼손과 맞잡은 두 손이 등장하지만, 시집 중반부에 사랑의 매개이자 표현으로서 손을 노래한 시편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된 점은 인상적이다. 왜 손인가. 손은, 신체의 맨 끝이자 맨 앞인 손은, 도구 이전의 세계를 대표한다. 벌거벗은 진실 하나가 다른 진실 하나와 만나는 일에 손은 관여한다. 이렇게. “손이 하는 일은/ 다른 손을 찾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에게 지고/ 내가 나인 것이/ 시끄러워 견딜 수 없을 때/(…)// 손을 보라./ 왼손은 늘 오른손을 찾고/ 두 손은 다른 손을 찾고 있었다./ 손은 늘 따로 혼자 있었다./ 빈손이 가장 무거웠다.”(<손은 손을 찾는다> 부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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