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들”처럼 범선에 실린 노예들에게 각자 주어진 공간은 1인용 관보다도 좁았다. 이들은 식민지 농장에 팔려가 ‘설탕 노새’나 ‘목화 따는 검둥이’로 불리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우물이 있는 집 제공
<자본주의와 노예제도>
에릭 윌리엄스 지음, 김성균 옮김
우물이 있는 집·2만4000원 지은이를 먼저 소개하는 게 순서인 것 같다. 에릭 윌리엄스(1911~1981)는 카리브해의 영국 식민지 트리니다드 섬에서 태어나 1962년 8월 독립한 트리니다드토바고 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그는 1931년 섬 지역 장학금의 단독 수혜자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근현대 역사를 공부했다. 윌리엄스는 거기서 식민지 출신에 대한 차별을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식민지 동포들의 역사를 영국 제국 중심으로 분석하는 지식 관행을 의문시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그런 문제의식으로 7년을 공부한 결과인 박사학위 논문을 1943년 단행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그의 나이 32살 때였다. <자본주의와 노예제도>의 핵심적인 주장은 “흑인노예들은 서양세계의 근력과 근육들이었다”는 문장으로 요약된다. 해가 지지 않는 브리튼 제국뿐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이른바 ‘제1세계’의 영광은 그들이 애초부터 뛰어나서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을 착취한 결과라는 자명한 사실이다. 요컨대, 영국에서 태동한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뿌리가 노예무역과 노예노동에서 벌어들인 식민지 초과이윤에 있다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광범위한 통계 자료와 신문 보도, 연설 등을 인용한다. “먼저 본국에서 생산한 공산품을 싣고 출항하여 아프리카 해안에 도착한 노예무역선은 공산품들을 팔고 그곳의 흑인노예들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이익금을 챙겼다. 그리고 노예무역선은 매입한 흑인노예들을 식민농장들로 실어가서 팔고 그 농장들의 생산물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이익금을 챙겼다. 마지막으로 노예무역선은 식민농장들에서 매입한 생산물을 본국으로 실어가서 판매하여 또 다른 이익금을 챙겼다.” 초기 산업자본주의 탄생시킨
노예노동과 노예무역의 전말 이런 식의 삼각무역은 영국의 산업을 삼중으로 촉진했다. 흑인노예들이 걸칠 셔츠를 생산하는 섬유산업, 노예들과 상품을 실어나를 배를 만드는 조선업과 해운업, 그 배들의 경제적 안전을 보장하는 보험업, 배와 총과 기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제철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노예무역의 중심지 리버풀, 면직물의 도시 맨체스터, 총기류의 메카 버밍엄 등이 번성했고, 돈이 흘러넘치자 리버풀과 맨체스터에서 은행들이 생겨났다. 지금도 유럽의 주요 은행으로 건재한 바클레이 가문의 데이비드 바클레이는 노예무역업자였을 뿐 아니라 자메이카 섬에 있는 넓은 식민농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산업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는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발명 자금 역시 서인도제도 무역을 통해 축적된 자본(로 비어 은행)에서 나왔다. 자본주의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 책의 주장이 새롭게 들리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초기 산업자본주의 탄생의 비밀을 폭로하는 비망록 같은 존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논쟁적인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예컨대, 19세기 들어 영국이 노예제도를 철폐하게 된 이유는 인도주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는 주장은 지금 들어도 도발적이다. “흑인노예들의 해방을 촉진한 것은 바로 흑인노예노동이 창출한 경제력의 발달이었다”는 것이다. 1806년 잉글랜드에 쌓여 있는 잉여 흑설탕은 6000만t에 이르렀는데, 해결책은 생산량 감축뿐이었다. 생산을 억제하려면 노예무역을 폐지해야 했다. 영국 정부는 노예무역을 폐지한 스페인 정부에 40만파운드를 보상금으로 지급하기도 한다. 영국 정부의 노예무역 폐지 주장에 대해 당시 영국의 한 국회의원은 “수지맞는 인간애”라고 비아냥대기도 했다. 에릭 윌리엄스는 1939년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하워드대학교의 사회정치학 교수로 일하다 1948년 카리브해 지역의 미래를 연구하기 위해 카리브위원회 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카리브위원회가 비밀리에 추진하던 식민주의 정책을 강력히 비판하며 위원들과 심하게 다툰 끝에 1955년 소장 자리를 박차고 트리니다드 섬으로 귀향해 정치에 뛰어든다. 1956년 자신이 창당한 ‘민중민족운동’의 당대표로서 트리니다드토바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1961년 독립을 이끌어낸다. 1981년 3월29일 총리 집무실에서 사망할 때까지 총리직을 연임하며 ‘경험적 사회주의 정책’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지금도 ‘국민의 아버지’로 칭송받고 있다. 책의 결론 부분에 나오는 잠언 같은 문장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무릇 자익추구에 몰두한 인간들은 스스로의 활동이 낳는 최종 결과들을 거의 자각하지 못하는 법이다. (…) 시대의 정치이념과 도덕관념은 그것들이 경제발달과 맺는 아주 긴밀한 관계 속에서 검토해야 한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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