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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가부장제 맞선 한국 여성학 30년…이젠 젊은층 답답함 풀어줄 때

등록 2014-06-11 20:14수정 2014-06-11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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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고 신선한 지식인 문화운동? ‘배운 여자’들이 잘 난 척하는 ‘부르주아 운동’? 1984년, 여성학 연구자나 여성운동가들은 이런 상반된 평가를 한몸에 받았다. 그리고 30년이 흘렀다. 세상은 얼마나 바뀌었을까?

지난 6일 오전 서울에서 떠난 버스는 8시간을 달려 전라남도 해남에 도착했다. 30년 전, 세상을 바꿔보려는 의지에 불탔던 젊은 교수였던 사람들의 머리카락엔 어느새 새하얀 서리가 내렸다. 팽목항이 내다보이는 미황사에 도착한 그들이 말했다. “그땐 참 낙관적이었고 이상주의적이었는데. 아들 딸을 ‘성’에 구애받지 않고 키우면 우리 사회가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처음 가르친 사람들이 이제 세월호 참사를 겪은 딱 그 학부모 세대들이죠.”

올해는 성평등·다양성·탈권위주의 등을 창립취지로 내건 ‘또 하나의 문화’(또문)가 생긴 지 30년, 한국여성학회가 만들어진 지 30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지난 6일, ‘또문’ 초기 동인들이 해남 미황사에서 연 ‘고정희 시인 추모 문화제’에 오랜만에 자릴 함께 했다. 이들은 한국여성학회 창립에도 중요한 구실을 했다.

1984년 ‘또문’을 만든 이들은 조형 한국여성재단 이사장(전 이화여대 사회학 교수),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문화인류학), 조옥라 서강대 교수(사회학), 조은 동국대 명예교수(사회학), 이상화 이화여대 교수(철학), 장필화 이화여대 교수(여성학) 등이며, <여성신문> 초대 주간을 역임한 고 시인도 초기 동인으로 활동했다.

1980~90년대 한국 여성학 이끈
‘또하나의 문화’ 창립 30돌
‘여성해방’ 기치로 이론-운동 결합
교육서 성문제까지 가부장제 뒤엎는
파문 일으키며 사회변화 이끌어

인문학 위기 속 여성학도 ‘동반 홍역’
“혼란 겪는 20~30대 여성 위한
적당한 담론 제공 못해” 반성

‘또문’은 1980~90년대 한국 여성학을 이끈 대표적 페미니스트 모임이다. 하지만 남성주도의 변혁운동에 전면적으로 합류하지 않는다는 흠집내기에 오래 시달렸다. 우리나라 여성학과 여성운동의 견인차 구실을 한 조형 이사장은 “남녀가 평등하고 협력하는 사회, 다양성을 인정하는 대안 문화를 지향했지만 비판도 많았다”고 옛일을 되새겼다.

동인들은 ‘침공하기보다 낙후시켜라’는 전략으로 ‘따로 또 같이’ 논쟁하며 운동했다. 조은 동국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여성으로서)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각자 선 자신의 자리에서 ‘반란’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첫 독일파 여성철학자인 이상화 교수는 “귀국 뒤 헤겔리안 마르크시스트의 입장에서 논문을 쓰면 동인들로부터 ‘네가 명예남자냐, 왜 여자 이야기는 없느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고 초창기 일화를 들려주었다.

‘또문’은 1985년 동인지 1호 <평등한 부모 자유로운 아이>를 냈고 <열린 사회 자율적 여성>, <여성 해방의 문학>을 잇따라 발간했다. 특히 ‘여성해방’이란 말은 분리주의의 어감을 준다며 남성 동료들의 반대가 거셌지만 기어이 “쓰고 말았다”. 조한혜정 교수는 “지금은 진부해진 ‘여성해방’이란 용어가 그때는 금기를 깨뜨리는 혁명의 씨앗이었다”며 “동인지는 1980년대 보수적 남성들에게는 ‘불온문서’였고 1990년대엔 ‘소프트’한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였다”고 했다. 1990년대까지 동인들은 <새로 쓰는 사랑 이야기> <새로 쓰는 성 이야기> 등을 내놓으며 교육부터 성관계 문제까지 가부장제를 뒤엎는 파문을 불러일으켰고, 여전히 보수적인 환경 속에서도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았다. 어린이 캠프, 위안부 진혼굿 등 다양한 공연과 교육문화실험도 거듭해 오늘날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인 ‘하자센터’, 공동육아 등을 통해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또문 출범과 같은 해인 1984년 창립총회를 연 한국여성학회는 초대회장으로 윤후정 당시 이대 법정대학장을 선출했다. 첫 학술대회에서 ‘한국 여성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이란 대주제 아래, 소수자로서의 여성적 시각을 강조하는 ‘젠더 감수성’을 학문생산에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학계는 강의실에서만 만들어진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이슈와 함께 발전해왔다. 1990년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방일 일정에 맞춰 정신대 진상규명과 사죄 배상을 요구했고, 연구자들은 1993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될 때까지 성희롱·성폭력 사건의 대항 논리를 만들고 운동가를 생산하는 ‘산파’ 노릇을 맡았다.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한국 여성학의 가장 큰 특징은 지적 저항성을 가진 이론과 운동의 결합”이라고 풀이했다.

대학 바깥에서 여성학 논의를 풍요롭게 한 움직임도 있다. 1997년부터 페미니즘 이론 생산과 강좌, 세미나·출판을 병행해온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대표 손자희)는 라캉의 정신분석학 이론 등을 소개하고, ‘성매매’를 ‘성노동’(섹스워크)으로 보아야 한다고 선언해 성매매방지법을 지지하는 기존 여성계와 입장을 달리 했다.

요즘 한국 여성학은 인문학의 전면적 위기 속에 동반 홍역을 겪고 있다. 대구 가톨릭대, 한양대, 숙명여대가 2000년대 들어 차례로 여성학과를 폐지했으며 성신여대 여성학 협동과정도 지난 5년 동안 신입생이 없어 사실상 명맥이 끊어졌다. 조주현 계명대 교수(여성학)는 “여성학 위기는 20~30대 여성들이 각자의 삶을 기획하는 데 혼란을 겪는 상황에서 적당한 담론을 제공해주지 못한 탓”이라며 “그들의 답답함을 풀어줄 담론 생산이 절실하다”고 분석했다.

이런 숙제 앞에 한국여성학회는 오는 21일 고려대학교에서 춘계학술대회 ‘한국여성학 30+: 여성주의 발전과 불균등성’을 연다. 손승영 한국여성학회 회장은 “30년 역사를 거치면서 이제 정회원 800여명의 거대 학회가 되었다.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로서 여타 학문과도 폭넓게 교류해나가겠다”고 말했다.

30년을 맞은 또문의 고민도 깊다. 조옥라 교수는 “요즘 세월호 참사, 지방선거 여성후보 참패 등을 보며 80년대 열렬하게 고민했지만 우리가 과연 뭘 했어? 사회가 뒤로 가는 거 아니야? 질문한다”며 “결국 희망은 위계적인 조직이 아니라 나와 연결된 ‘사람’한테서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조한혜정 교수는 여성주의자들의 생태공동체에서 미래를 찾았다. “앞으로 후배들은 더불어 텃밭을 가꾸고 밥을 먹으면서 같이 학습하고, 삶과 멋진 프로젝트를 함께 하면서 성장해가면 좋겠습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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