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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음식과 사랑, 40대 샐러리맨이 사는 이유

등록 2014-06-29 19:59

<춘정 문어발>
<춘정 문어발>
춘정 문어발
다나베 세이코 지음, 서혜영 옮김
작가정신·1만3000원
치밀한 심리묘사는 일본 소설의 전매특허다. 게다가 음식에 대한 ‘오타쿠적’인 집착과 주로 혼잣말로 속삭이는 소심한 유머까지 곁들여지면 완벽히 일본적인 무언가가 완성되는 느낌이다. 아주 짧게, 잠깐씩, 소심하게 키득거리게 만들면서 기분이 환해지는 그런 것 말이다.

1928년생 일본 작가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집 <춘정 문어발>(작가정신)이 그런 책이다. <춘정 문어발>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제목은 남녀간의 정욕이라는 뜻의 ‘춘정’과 문어 다리가 들어간 어묵을 합친 말이다. 표제작 ‘춘정 문어발’을 비롯해 이 소설집에 실린 8편의 단편소설 제목은 모두 어떤 음식과 어떤 ‘정’의 조합으로 이뤄져 있다. 모정 기쓰네 우동, 인정 스키야키 이야기, 오코노미야키 무정, 박정 고래, 다코야키 다정, 당대 복지리 사정, 된장과 동정 등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집은 식욕과 성욕이라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지렛대로 인간의 내면을 탐구하는 셈이다.

여성 작가가 모든 소설의 주인공으로 40대 샐러리맨 남성들을 내세운 것은 ‘소시민 소설’의 전략적 장치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결혼 유무에 따라 이혼남이거나 노총각이기도 하고, 유부남이기도 하지만 공통점은 소심한 남자들이다. 이미 취향이 완성되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걸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한다. 이들은 아내와 딸들, 혹은 부하 여사원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토속 음식을 찾아 회사 주변을 돌아다닌다. 그리고 꿈에 그리던 식당에서 꿈에 그리던 음식을 입안 가득 넣고서야 살아있는 유일한 의미를 찾았다고 단언하는 부류들이다.

이를테면 ‘춘정 문어발’의 이런 문장. “그 손님이 바글대는 가게는 말이지, 아주 부드럽게 익힌 문어가 명물이지만, 뭐 그것도 맛있긴 한데, 아마추어풍으로 돌기가 탱탱하니 딱딱한 문어가 난 더 맛있어. 게다가 오뎅 국물의 그 삼삼한 맛도 좋았어. 역시 술안주는 오뎅이야. 슈토(酒盜, 가다랑어 내장으로 담근 젓갈. 일본의 인기 술안주로 ‘술도둑’이라 불린다)나 해삼 창자 젓갈 같은 짠 안주로 술을 마시면 안 돼. 그건 진정한 술꾼의 도가 아니거든.” 요즘 말로 ‘덕후 돋는’ 문장들이 세심한 미각을 뽐낸다.

1987년 초판이 발행됐으니까, 음식 하나하나마다 에피소드를 엮어내는 만화 <심야식당>의 대선배 격인 셈이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수준은 <심야식당>이 명함을 내밀기 어려울 정도로 월등하다.

그리고 유머라는 화룡점정. ‘다코야키 다정’의 주인공 나카야는 머리가 벗겨지는 나이가 되도록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이다. 어머니가 주선한 맞선에 나갔다가 다행히도 자기처럼 다코야키를 좋아하는 여성을 만났는데, 여성이 이끌어 들어간 식당은 아뿔싸, 그가 싫어하는 퓨전식이었다. 결국 맞선상대와 다코야키 논쟁을 벌였고 여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버렸다.

“그 눈빛에는 ‘죽어버려, 대머리’ 하는 듯한 격렬함이 느껴져서 나카야는

‘미인도 악녀의 일종이군.’

하고 생각했다.”

다나베 세이코는 영화로 더 유명해진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원작자다. 1964년 <감상 여행>으로 제50회 아쿠타가와상을 받는 등 숱한 문학상을 휩쓴 원로작가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사적인 시간>(북스토리)이 2007년 출간됐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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