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1857~1929)은 지배계급의 과시적 소비와 기업가의 돈놀이를 질타한 <유한계급론>(1899)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100년 전, 미국 대학이 사업 논리에 휘둘려 망가지고 있다고 일갈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번역돼 나온 <미국의 고등교육>(길 펴냄)은 냉소적 비주류의 길을 걸으며 여러 대학을 전전하던 베블런이 61살에 쓴 책이다. 신랄한 표현과 난해한 문장으로 악명 높지만 비판적 문제의식에 공감한 두 경제학자가 과감히 팔을 걷어붙였다. 마르크스·케인스 이론 전문가 홍훈(59)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와 박종현(49) 경남과학기술대 산업경제학과 교수다. 우리말 번역은 원문의 혼란을 믿기 힘들 정도로 탄탄하고 선명하다. 오랜 기간 “둘만의 세미나”로 원문을 정교하게 분석한 덕이다. 홍 교수는 “적어도 한국에선 <유한계급론>보다 더 가치롭다”고 했으며, 박 교수는 “<유한계급론>의 심화확장판으로서 ‘고전’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했다.
20세기 초, 베블런은 미국의 대학이 금전 추구의 맥락 속에 놓여 있었다고 분석하며 상아탑이 아수라장으로 변하는 과정을 기술했다. 자본주의 초기, 돈만 잘 벌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업가들이 대학 이사회에 들어가게 된 것부터가 문제였다. 휘황찬란한 부동산과 건물을 쌓아 올려 외양을 치장하며 대학의 평판을 높이는 데 관심이 많은 총장, 대학 기업화에 한몫을 하는 ‘구질서의 대변인’ 유한계급 기부자들, 비판적 지식 탐색과 무관한 철부지 유한계급 청소년들도 대학을 망친 주범이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의 대학은 이런 문제를 상당히 극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박 교수는 “자본주의가 한창 성장하던 20세기 초반 미국은 기업이 지배하는 사회였지만 1930년대 대공황 뒤 뉴딜 정책을 거쳐 사회가 기업을 규율하고 민주적인 규범이 생기면서 대학도 그에 맞게 변모했다”고 설명했다.
반면, 한국은 내적인 민주화 과정을 달성하지 못했다. 홍 교수는 “1987년 이후 한국은 민주화를 이룬 것처럼 보이지만, 1997년 경제위기를 맞으며 신자유주의적 경쟁논리가 들어와 모든 미시조직의 비민주성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대학뿐 아니라 병원, 교회, 관료조직, 법원, 군대의 수장들이 더욱 심각한 권위주의로 독단과 독선을 일삼아 여러 조직에서 ‘작은 독재자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새 총장이 가장 먼저 하는 건 보기 좋은 건물을 짓는 것이다. 바벨탑처럼.”
베블런 못지않은 맹공이다. 특히 ‘명문’으로 일컫는 서울대와 연세대의 총장 선출과 경영의 문제를 홍 교수는 통렬하게 비판했다. 베블런이 대학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꼽은 것도 바로 이사회와 총장의 전횡이었다. 홍 교수는 “서울대는 법인화 뒤 총장 선거에서 2등을 한 후보를 이사회가 낙점하는 바람에 27년 만에 교수협의회 비상총회가 열린다고 한다. 연세대는 총장이 투표자의 85% 이상이 반대한 개발 사업을 밀어붙이고 부총장·학장 선임 때 교수들이 절대 투표할 수 없다는 이사회의 비민주적 결정을 공공연히 선전한다”고 말했다. 총장과 이사회의 이런 독단을 막으려면? “선출을 직선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블런은 아예 대학 총장과 이사회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래 총장은 동료에게 존경받고 성숙한 ‘교수들의 대변인’이었다. 하지만 지식 추구에 관심과 능력이 없는 기업인이 이사회를 장악하면서 “동종교배적 인사”로서 구색만 갖춘 수완 좋은 총장을 뽑아 문제를 일으킨다. 총장은 ‘말 안 듣는 교수들’을 빼고 은밀하게 복종적인 파당을 만들고 거느린다. 대학은 ‘한가로운 호기심’으로 지적 추구를 해야 할 본분과는 점점 멀어지고, 특정 학교와 학과들 사이에서도 영토 싸움이 벌어진다.
박 교수는 베블런의 이런 지적이 학문을 실용적 목적에 따른 세속적 성공의 도구로만 여기는 우리 현실과 다를 바 없다고 개탄했다. “중세 철학이 신학의 노예였듯, 베블런은 근대 이후 대학이 금전의 시종이 됐다고 봤다. 진리 추구가 아니라 돈벌이 때문에 인문학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서글프다고 했다. 우리도 인문학을 알아야 사업을 더 잘할 수 있다고 강조하지 않나.”
베블런은 대학의 큰 덩어리를 쪼개 학부 교양교육은 중등교육기관으로, 전문대학원의 전문인력은 전문교육기관으로 넘기자고 제안했다. 대학은 대학원 중심의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이런 제안은 일리가 있다고 홍 교수는 말했다. “학벌 등 우리 사회 고질적 병폐가 모두 ‘큰 덩어리’와 연관되므로 ‘칼리지’ 중심으로 독립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교수도 동의했다. “큰 조직은 불필요한 행정비용을 유발한다. 대학 구조조정도 경영학과를 늘리고 독문·불문과를 없애는 식으로 일자리에 대한 수요 변화로 대응하면 대학은 책임있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베블런에게 대학은 대학원·학문중심, 교수와 학생의 도제관계 시스템이 확립된 ‘학술의 전당’이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대학은 무엇인가? 홍 교수는 “사회적으로 합의된 바 없다”고 말했다.
“대학이 무엇인가? 지식과 인식, 앎과 삶은 어떻게 연결할까? 이런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정부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정책이나 기업 논리에 맞서 학문 영역이 버틸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획득해 자율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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