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프랑스에서 ‘아나키스트 강도단’ 사건으로 체포됐을 때의 세르주. 러시아혁명 뒤 볼셰비키가 된 그는 스탈린주의를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비타협적으로 싸웠다. 오월의봄 제공
<한 혁명가의 회고록>
빅토르 세르주 지음, 정병선 옮김
오월의봄·2만7000원 빅토르 세르주(1890~1947). 우리는 그를 잘 모른다. 젊은 시절 프랑스 파리에서 아나키스트로 활동하다 러시아로 건너가 볼셰비키가 된 혁명가.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집권하자 스탈린 정권을 전체주의로 규정하고 끝까지 싸운 민주 투사. 숱한 동지들이 암살당하고 자살했지만 용케도 살아남았고, 불굴의 필력으로 ‘배반당한 혁명’을 증언한 작가. 혁명가이기 이전에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수준 높은 소설과 산문을 남긴 그가 이토록 철저히 잊혀진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매장당했던 사연과 무관하지 않다. ‘좌익 반대파’였던 그는 좌파와 우파 모두의 적이었다. “미국에서는 보수적 출판사들이 내 작품을 너무 혁명적이라고 판단했고, 좌익 출판사들은 너무 반전체주의적, 다시 말해 스탈린 체제를 너무 혹독하게 비판한다고 규정했다.” 러시아에서 그의 책은 분서(焚書)되거나 압수당했고, 출판사는 목록에서 삭제했다. 로맹 롤랑과 앙드레 지드 같은 유명 문인들의 탄원으로 가까스로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정착했던 유럽과 남미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은 세계 각 나라의 공산당을 통해 세르주를 괴롭혔다. 세르주가 잊혀진 작가가 된 데는 그가 날 때부터 무국적자였던 탓도 있다. 그는 벨기에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러시아를 탈출한 망명객이었다. 프랑스어로 쓴 소설은 러시아 소설의 계통을 이었다. 망명지 멕시코에서 1943년 완성한 <한 혁명가의 회고록> 역시 그의 사후인 1951년에야 빛을 봤다. 이 책은 혁명의 한가운데서 온몸으로 시대를 통과했던 세르주의 자서전이다. 고전 반열에 오른 존 리드의 <세계를 뒤흔든 10일>이 관찰자가 본 러시아혁명이라면, 이 책은 명실상부한 1인칭 시점의 혁명기라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러 혁명의 시대 불살랐던 세르주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과 투쟁 책에는 동시대를 살았던 혁명가와 작가, 예술가들의 이름이 곳곳에 출몰한다. 그는 작가다운 관찰력으로 거의 모든 인물을 상세히 묘사한다. “안토니오 그람시도 빈에 체류 중이었다. (…) 몸은 꼽추여서 작고 연약했다. (…) 그람시는 일상생활이 서툴렀다. 익숙한 곳인데도 밤이면 길을 잃었고, 전차를 잘못 탔으며, 숙소의 안락함이나 식사의 질에 무심했다. 하지만 그의 지적 능력은 완벽했고, 활기가 넘쳤다. 그람시는 변증법을 직관적으로 활용했고, 냉큼 허위를 파악해 역설로서 제시했다. 그렇게 제시된 세계는 더할 나위 없이 명료했고 말이다.” 레닌에 대한 그의 평가는 초기 볼셰비키에 대한 그것처럼 긍정적이다. 그는 레닌을 활기차고 명료하면서도 합리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레닌이 자주 한 유명한 말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는 영예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민족에게 닥치다니 참으로 불운하다.’ 그럼에도 유럽의 당시 상황을 살펴볼 때, 볼셰비즘이 옳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피로 물든 유럽, 폐허가 된 유럽, 인사불성에 혼수상태인 유럽을 떠올려보라. 볼셰비즘은 역사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러나 백군과의 치열한 전투, ‘반동세력’의 끊임없는 준동 속에서 볼셰비키는 비밀경찰(체카)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재판 없는 감금과 처단에 익숙해져갔다. 전체주의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정작 세르주는 트로츠키 및 그 추종자들과 자주 논쟁을 벌였다. 트로츠키는 정부군 1만명이 사망한 1921년 크론시타트 봉기에 대한 볼셰비키의 강경 진압을 옹호했지만 세르주는 반발했다. 태생적인 디아스포라로서 세르주는 모든 폭력에 반대하는 도저한 민주주의자였다. 정부에서 일하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는 돈과 권력에 환장한 파리떼들을 경멸하며 전혀 다른 길을 택했다. 러시아 농촌으로 들어가 농업 공동체를 세우겠다는 포부였다. 그러나 그 시도 역시 농민들의 차가운 외면 속에 실패하고 만다. 멕시코에서 죽을 때 그의 주검은 “구멍난 양말”과 “나달나달해서 꼭 누더기” 같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인생은 처절하게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신자유주의의 야만이 전일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요즘, 그의 이상은 오히려 더 값져 보인다. “인간의 가치를 격하하는 모든 것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인간을 해방하고 확장해주는 모든 투쟁에 가담해야 한다. 그렇게 참여하면 오류도 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정언 명령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사는 것이 더 큰 과오이기 때문이다.” 출판사 오월의봄은 <한 혁명가의 회고록>을 필두로 세르주 선집 5권을 잇달아 낼 계획이다. <툴라예프 사건> <세기의 한밤중> <정복당한 도시> <우리 권력의 탄생>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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