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대녕 장편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2년전 제주로 떠난 작가와
제주로 간 주인공을 취미는 낚시
“살생을 해야 득도합니다”
‘죽음’에서 낚아올린 건 ‘삶’
호랑이띠 자전적 색체 묻어나
소설가 윤대녕(43)씨가 홀연 제주로 향한 것은 2003년 4월이었다. 문인들이 몰려 사는 신도시 일산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며 한 시절을 구가하던 끝이었다. 술자리를 피해, 외로움을 각오하고 내려간 제주에서 그는 무엇보다 낚시에 몰두하는 모양이었다. 이따금씩 보내 오는 이메일은 ‘오늘의 조과’라는 제목 아래 그날 잡은 물고기들의 사진과 이름을 안내하는 내용이었다. 물고기들은 바닥에 펼쳐 놓은 신문지 위에 눕혀져 있기도 했고, 잠이 덜 깬 어린 아들의 손에 들려 있기도 했다. 벵에돔이며 우럭이며 학꽁치며, 고기 종류별로 먹는 방법이 간단하게 덧붙여져 있기도 했다.
윤대녕씨는 올해 4월, 2년 동안의 제주 생활을 마감하고 일산으로 돌아왔다. 그는 왜 제주로 갔던가. 그가 새로 내놓은 장편소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생각의나무)에 그 해답의 일단이 들어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와 동갑인 소설가 ‘영빈’. 그는 어느날 홀연히 제주로 떠난다. “호랑이를 잡으러”(24쪽) 제주에 온 그가 주로 하는 일은 그러나 낚시, 한갓 물고기 잡기일 뿐이다. 소설은 영빈이 제주 바다의 이런저런 포인트들에서 낚시줄을 드리우고 물고기를 낚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또 집요하게 기술한다. 소설 속에서 “영빈은 신문지 위에 퍼득거리는 물고기를 올려놓고 사진을 찍어 서울로 보냈다.”(20쪽)
서울에는 누가 있었던가. 그보다 아홉 살 어린 여자친구 ‘해연’과, 두 사람의 술친구이기도 한 수수께끼의 재일동포 ‘히데코’가 있다. 영빈과 해연은 기묘한 인연으로 얽힌 사이. 두 사람은 1994년 10월21일 성수대교 붕괴 때, 무너지는 다리 바로 앞에까지 이르렀으나 다행히도 강물로 떨어져내리지는 않은 택시 안에 낯선 동행으로 앉아 있었다. 그로부터 9년 뒤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살게 된 두 사람은 친구도 아니고 연인도 아닌 어정쩡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참이다. 히데코는 그들이 자주 들르는 카페에서 만난 사람으로, 둘 사이의 느슨한 관계에 긴장과 탄력을 불어넣는 구실을 한다.
영빈 따라다니는 죽음의 그림자
영빈과 해연, 두 주인공의 관계에 개입하는 것이 히데코만도 아니다. 영빈과 그 아버지, 해연과 그 어머니 사이의 심각한 갈등이 둘의 앞을 거대한 바위처럼 가로막고 서 있는 형국이다. 그 갈등은 각각 가까운 가족 구성원의 죽음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영빈 부자의 경우에는 대학 시절 동료 학생들에게 프락치로 몰려 자살한 형의 죽음이, 해연 모녀의 경우에는 다른 남자를 사랑해서 떠나간 어머니 때문에 상심해서 미친 듯이 바다낚시를 다니다가 실족해 죽은 아버지의 죽음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두 사람 사이를 훼방 놓으며 결국은 도와주는 히데코에게 죽음과의 친연성은 한층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학교 동창으로 자신처럼 한국인의 피가 4분의1 섞인 실존인물 사기사와 메구무가 소설가로 등단하는 모습을 보며 충격과 질투에 사로잡힌 끝에 대학생과 성관계를 맺기에 이르는데, 그는 자신의 등에 제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 놓고는 자살하고 만다. 등의 문신은 그로 하여금 이후 다른 남자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거니와, 사기사와 메구무의 자살 소식을 들은 얼마 후 히데코 역시 도쿄로 돌아가 자살을 택한다.
“영빈씨 주위엔 늘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있어요”(344쪽)라고 해연은 영빈에게 말하는데, 죽음은 영빈만이 아니라 해연 자신과 히데코 역시 줄기차게 따라다닌다고 해야 옳다. 무엇보다 영빈과 해연은 성수대교 붕괴라는 집단적 죽음의 현장에서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니겠는가. 영빈의 시점을 빌린 소설의 지문에 따르자면 두 사람은 “각자 모든 것이 붕괴된 시점에서 서로를 만났던 것이다.”(385쪽)
그런 의미에서 영빈의 제주행은 죽음과 붕괴로부터 신생을 찾아 나선 순례길이라 할 수 있다. 제주에서 그는 낚시를 통해 무수한 물고기들을 죽음으로 이끄는 것인데, 그에 관해서라면 이른 죽음을 맞기 전까지 줄기차게 제주의 풍광을 찍었던 사진작가 김영갑의 말을 새겨들을 만하다: “살생을 해야 득도합디다. 그렇게 무구한 목숨들을 밟아죽이고 나니 비로소 생명이 아름답다는 걸 깨닫게 되더이다.”(245쪽) 소설의 말미 가까이에서 영빈이 “이제 나는 더 이상 산 것을 죽이지 못한다”(422쪽)고 독백하는 것을 그 나름의 ‘득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죽음에서 삶 쪽으로 건너오게 된 데에는 제주로 그를 찾아와 욕조 안의 물고기들과 한 몸이 되는 의식을 치른 뒤 그의 아이를 수태하고 서울로 올라간 해연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해연에게 물고기 욕조에 들어가기가 그 나름의 정화 의식이었다면, 영빈에게 있어 그에 해당하는 계기는 사계리 사람 발자국 화석에 제 발을 맞춰 보는 행위였다. 그 순간 영빈은 “자신의 존재가 비롯된 최초의 지점으로 돌아와 있음을”(81쪽) 느끼거니와, 그 화석이 있는 장소를 그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지점”(361쪽)이라고 해연에게 설명한다. 영빈은 제주를 떠나 서울로 향하기 직전 다시금 사람 발자국 화석을 찾아가 발을 맞춰 보는데, 그것은 죽음의 아픈 기억을 떨쳐버리고 신생의 앞날로 걸어나가겠다는 적극적 의지의 표현이라 하겠다.
‘윤대녕스럽지’ 않은 해피엔딩
‘시원으로의 회귀’로 요약되는 윤대녕씨의 소설 세계에서 주인공들은 일쑤 타락하고 비본질적인 세계의 ‘이쪽’을 벗어나 존재의 본래적 자리라 할 세계의 ‘저쪽’으로 넘어가고는 했다. 이번 소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에서는 영빈이 ‘존재의 시원’을 확인하고서도 현실의 삶이 이어지는 ‘지금 이곳’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비록 히데코의 죽음이 ‘제물’로 바쳐지기는 하지만, <호랑이는…>의 결말은 윤대녕 소설로서는 드물게 해피엔딩의 모양새를 보이기도 한다. 해연은 어머니와, 영빈은 아버지와 각각 화해하며, 두 사람은 주저와 갈등을 접고 확고히 결합하는 것이다. 심지어 영빈은 소설가로서도 슬럼프에서 벗어나 다시 글쓰기에 집중하게 된다. 주인공의 삶의 구체적 세목과는 무관하게 <호랑이는…>은 윤대녕씨의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자전적인 요소를 많이 간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호랑이띠 소설가 영빈이 작중에서 쓰고 있던 소설의 완성된 형태가 그 역시 호랑이띠 작가인 윤대녕씨의 이번 작품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라 할 수도 있겠다.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두 사람 사이를 훼방 놓으며 결국은 도와주는 히데코에게 죽음과의 친연성은 한층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학교 동창으로 자신처럼 한국인의 피가 4분의1 섞인 실존인물 사기사와 메구무가 소설가로 등단하는 모습을 보며 충격과 질투에 사로잡힌 끝에 대학생과 성관계를 맺기에 이르는데, 그는 자신의 등에 제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 놓고는 자살하고 만다. 등의 문신은 그로 하여금 이후 다른 남자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거니와, 사기사와 메구무의 자살 소식을 들은 얼마 후 히데코 역시 도쿄로 돌아가 자살을 택한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