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피로사회’ 이후 봇물 터지듯
2013년에만 10종 넘게 쏟아져
“우리 사회 피로감 담은 키워드”
학술서보다는 대중서 가까워
엄밀하고 체계적인 담론 돼야
2013년에만 10종 넘게 쏟아져
“우리 사회 피로감 담은 키워드”
학술서보다는 대중서 가까워
엄밀하고 체계적인 담론 돼야
인터넷서점 알라딘은 ‘○○사회 총집합’이라고 이름 붙인 기획전에서 ‘○○사회’라는 제목의 책 26종을 한꺼번에 소개하고 있다. 1992년 나온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부터 올해 출간된 책들까지다. 이 가운데 2010년 이후 선보인 책은 21종이고, 2013년에만 10종이 넘게 나왔다. 여기에 일부 책이 빠진 걸 고려하면, 실제로 ‘○○사회’라는 개념을 새로 제안하면서 사회 현상을 풀이하는 책들은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 ‘○○사회’ 유행, 왜? 출판계에서는 2012년 문학과지성사가 펴낸 한병철 독일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 교수의 <피로사회>가 베스트셀러에 오른 뒤 이런 경향이 강해진 것이라 보고 있다. 이 책은 출간 첫해 판매량 4만부를 넘어섰고, 지금까지 8만여부가 팔려나갔다. 2013년엔 <팔꿈치사회>, <허기사회>, <과로사회>, <잉여사회>, <절벽사회>, <격차사회>, <부품사회> 등이 쏟아져 나왔고, 올해엔 <단속사회>, <투명사회>, <분노사회>, <감성사회>가 출간됐다.
격주간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편집위원회는 지난 6월 말 ‘○○사회’라는 키워드로 사회 현상을 분석하는 책 30종을 선별해 <사회를 말하는 사회>(북바이북)를 냈다. 저술가, 학자, 언론인을 총동원해 각 책의 내용과 한계까지 꼼꼼히 진단하는 서평을 받은 것이다. <기획회의> 장동석 편집주간은 “‘○○사회’라는 말은 한국 사회의 피로감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키워드”라며 “각 영역에서 축적된 체제의 모순이 다 드러나는 상황에서 이 문제를 ‘어떤 사회’라고 보려는 경향이 생겨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라 전체의 문제나 여의도 정치에 관심을 두던 대중의 비평적 시선이 개인의 삶을 규명하는 쪽으로 옮겨갔기 때문에 이런 사회학적 개념들이 등장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출판평론가 변정수씨는 “예전엔 정치평론가가 24시간 뉴스채널의 고정 패널이었다면, 지금은 사회학자가 그 자리를 대신할 정도로 대중적인 사회학의 전성시대”라고 말했다. “사회학적 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설명이 안 되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난해 초 <잉여사회>를 펴낸 웅진지식하우스의 김보경 대표는 “원래 제목은 ‘나는 잉여다’였지만, ‘잉여’ 같은 시대적 징후를 사회학적 맥락에서 바라보는 책이었기 때문에 제목을 바꿨다”고 말했다. 이런 분석서가 앞으로 잇따라 나올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고 한다. “출판사 입장에서 ‘○○사회’라는 말이 던져줄 충격파를 고려한 건 사실이다. 이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명명하려는 시도 또한 계속될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독자들의 문제의식과 책의 주제가 잘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 대중서와 학술서 사이 국가가 아니라 사회가 주된 분석틀로 등장하게 된 것에 대한 긍정적인 풀이도 나온다. <사회를 말하는 사회>에서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스테판 메스트로비치의 <탈감정사회>를 소개하면서 “사회 혹은 신자유주의 체제 자체가 문제 영역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며 ‘○○사회’의 출간붐을 평가한 바 있다.
반면 같은 책에서 강양구 <프레시안> 기자는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평하면서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문제의식이 이미 국내 서동진의 박사논문과 책에서 정교하게 논증된 바 있다고 지적했다. 별다를 바 없는 내용일지라도 독일에서 성공한 학자가 ‘○○사회’라고 개념화했기에 더 인기를 끈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어쩌면 한국의 지식사회에 뿌리 깊이 박힌 사대주의와 무관하지 않다”며 “지식 권력의 위계가 존재하는 이런 현실부터 극복하지 못한다면 지금 여기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과 대안 없이 맨날 ‘○○사회’로 규정하는 지적 유희와 동어 반복만 계속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사회’라는 제목을 단 책들은 본격적인 학술서라기보다는 교양서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연구자들이 이런 저술과 강연을 통해 강단 밖 대중과 소통에 나서는 건 격려할 만하지만,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알라딘과 북바이북 출판사가 함께 연 ‘사회를 말하는 사회’ 대중강연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다. 사회학자 정수복씨는 ‘○○사회’라고 개념화한 책들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제 중구난방 쏟아지는 ‘○○사회’를 종합해 총체적인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함께 대담자로 나선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도 “사회과학에서 ‘개념의 과잉’이 나타나는 것은 문제”라며 “개념은 도구인데, 도구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 유행을 넘어 깊숙한 논의로 우석훈 박사와 함께 <88만원 세대>를 쓰면서 한때 ‘세대론’의 불을 붙인 바 있는 저술가 박권일씨는 “<88만원 세대>가 처음 나온 뒤에도 이상한 이름을 붙인 ‘○○세대’라는 아류가 많이 나왔다”고 했다. 그는 “‘○○사회’라는 제목 역시 처음에는 신선했고, 잘 쓴 책들도 많았지만 이제는 가벼운 스케치에 그런 제목을 붙인 듯한 책도 있다”고 덧붙였다. “‘○○사회’라며 선승이 화두 던지듯 하고, 대중은 그 개념을 소비하고 떠받들다가 유행이 지나면 잊어버리는 식이 돼선 안 된다”고 그는 말했다.
<환원근대>의 지은이 김덕영 카셀대 교수(사회학)는 “학술적으로 하나의 개념이 제시되면 이를 갖고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푸코의 ‘규율사회’라고 하면 경험연구, 비교연구, 역사연구를 하면서 풍부한 사례와 하부개념이 많이 나오지 않나. 이래야 이론적 논의가 풍부해진다”고 말했다. 또 “언론들 역시 학술적인 책은 주목하지 않고, 반대로 대중적이면 대서특필하면서 유행을 이끄는 경향이 강하다”고 비판했다. ‘○○사회’의 분석이 대학이나 지식인 사회에서 엄밀하고 체계적인 과학적 논의와 수준 높은 담론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점이 문제라는 것이다.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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