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마음>을 쓴 재일동포 학자 강상중(왼쪽)씨와 소설가 김연수씨가 19일 오전 서울 신문로 출판사 일조각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소설 ‘마음’ 펴낸 재일동포 학자 강상중 교수와 김연수 소설가의 만남
<고민하는 힘>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의 저서로 한국에도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는 재일동포 학자 강상중이 작가로 ‘변신’했다. 지난해 출간한 소설 <마음>은 일본에서만 30만부가 넘게 팔리는 등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한국어판(노수경 옮김, 사계절 펴냄) 출간에 맞추어 방한한 그가 19일 오전 <한겨레> 주선으로 서울 종로구 신문로 일조각 회의실에서 소설가 김연수와 만나 대담을 나누었다.
현대적 부조리에 부딪쳐 죽은 아들
대지진과 원전사고 겪은 일본인…
그 절망 생각하며 ‘마음’을 썼는데
‘세월호’ 겪은 한국과 겹쳐 놀랐다 강=지금 김 선생님의 말씀은 저로서도 매우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재일적 상황과 한국 문인들 상황이 한 곳으로 수렴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주변인이며 경계인이면서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대형 출판사의 유통 시스템과 상업주의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일치한다고 봅니다. 죽은 아들이 한때 하루키 소설을 맹렬히 읽었습니다만, ‘결국은 아무 것도 없지 않나’ 하는 게 죽은 아들의 하루키 독후감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그 말이 매우 강한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특히 일본의 하루키 팬들은 나에게 화를 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루키 문학이란 글로벌화 과정에서 표면에 떠다니는 수많은 감각을 잘 주워 담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루키 소설의 특징이라 할 갈등 없는 갈등과 고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젊은이들의 현실 같은 것에 한국 독자들이 빠져들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저로서는 일종의 위기감마저 느꼈습니다. 제 아들에게 하루키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 3·11 대지진과 원전 사고를 당한 일본인들에게 문학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면, 하루키로 대표되는 주류 문학은 엔터테인먼트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김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김= 한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졌다는 생각이 팽배했는데, 2009년 용산 참사 등을 보면 민주화 이전의 역사로 돌아가는 느낌도 듭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문학을 엔터테인먼트로 한정짓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각 세대만의 고유한 표현 방식이 있고 지금 세대가 아버지 세대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지금의 문인들은 예전에 비해서는 한층 연성화한 정치 활동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에는 3·11 대지진과 쓰나미를 다룬 학생들의 연극이 나오는데, 그 안에서는 쓰나미에 휩쓸려 죽은 아이가 이런 말을 합니다. ‘깜깜해. 깜깜해. 여기는 어디야? 나 배고파. 집에 가고 싶어. 나는 어디에 있는 거야?’ 세월호 사건을 겪은 한국 독자들에게 이 대목은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여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강= 저로서도 지금의 한국 상황과 이 책이 너무나 많이 겹치는 느낌이어서 놀랍게 생각합니다. 그런 점 때문에 출판사에서도 책을 내는 데 많은 주저를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월호 사건은 어떤 면에서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에 필적할, 그와 거의 대등한 것을 한국 사회에 남길 것이라 생각합니다. ‘민주화 이전’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일본에서도 지금의 상황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전전(戰前)’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김연수 작가
한국인,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 잃어
개인이 상황을 돌파해야 하는데
문학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생각
쓰나미·세월호…오래 기억해야 김= 저 개인적으로는 30대를 지나 40대가 되던 2009~2010 무렵 아버지와 장모 등 주변 분들이 병으로 돌아가시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계속 성장하고 나아지는 사회에 있다는 관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만,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나빠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불행감이든 것인데요. ‘민주화 이전’이니 ‘새로운 전전’이니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고민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고민하는 힘>과 <마음>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강= <고민하는 힘>을 쓸 때 저는 아들의 죽음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비판이든 뭐든 가능하지 않습니다. 세월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이를 되될릴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사회 안에 공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유족들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것이죠. 지금 세계의 가장 큰 문제는 공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책에서 공감이 사라지는 사회와 시대에 사람들이 죽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죽은 이들로부터 무엇을 상속받고 어떻게 전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려 한 것입니다. 김=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인들은 공적인 영역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정치의 불능이라 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렇다면 남는 것은 개인 차원에서 상황을 돌파해야 하는 것이죠.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지금 광화문에서 진행되고 있는 세월호 유족의 단식일 것입니다. 개인의 몸으로 상황을 돌파하려는 것이죠. 이런 시대에 문학이 필요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자연스레 던지게 됩니다. 작가로서 제 답은 ‘여전히 문학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한 개인을 위해 쓰일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문학이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러자면 또 다시 해결해야 할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과연 개인 대 개인으로서 우리는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소설을 써 온 제 결론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여러번 절망적 상황에 처하면서 소설을 써 왔습니다만, 이제는 바로 그 불가능 안에 이해의 실마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의 주인공 나오히로가 시신 인양 작업을 그만두기로 한 뒤에 일어난 변화에 ‘해답’이 있다고 봅니다. 쓰나미든 세월호 든 문제가 발생하면 빠른 시일 내에 해결하고 ‘잊어버리자’는 태도가 있는가 하면, 그것을 완전히 해결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오래 지니고 가겠다는 태도도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제 생각엔 후자가 바른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해하지 못한 것을 견딘다’는 게 <마음>의 결론이 아닌가 하는 게 저의 독후감입니다. 강= 한나 아렌트는 정치라는 것이 인간의 본질과 내면적으로 관련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정치의 붕괴는 곧 인간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지요. 대지진 이후 많은 일본인들이 지금 광화문에 있는 분들과 같은 생각과 행동을 했습니다. 일본인들 역시 공적 영역의 붕괴를 경험했던 것이죠. 이런 공통의 경험을 통해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과거의 역사적 문제와 관련해 서로를 이해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열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 너무 심각한 말씀만 나눈 듯합니다.(웃음) <마음>의 중요한 축은 젊은이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소설 속 젊은이들에게는 ‘사랑’이 매우 어려운 일인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라’는 게 소설의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우스운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려움을 무릅쓰면서 사랑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안 하면 안 될까요?(웃음) 강= 매우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예순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 생각해 보자면, 부부가 있어도 결국은 혼자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둘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사랑은 타자를 향하는 것이고 그것은 죽음 등으로 언젠가는 끝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언젠가 끝난다는 것을 전제로 성립하는 게 사랑이죠. 젊어서는 이런 생각을 하기 어렵고 그 때문에 맹목에 빠지기 십상이지만, 사랑 뒤에는 이런 잔혹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정리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영상은 하니티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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