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운동 거세지며 혁명적 기운
위기감 느낀 일제, 식민농정 수정
위기감 느낀 일제, 식민농정 수정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정연태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4만3000원
지난 2011년, 정연태 가톨릭대 국사학과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 논쟁을 둘러싼 10년간의 연구를 엮은 <한국 근대와 식민지 근대화 논쟁>(푸른역사)으로 학계의 눈길을 끌어모은 바 있다. 서로 참조점 없이 갈등을 거듭해온 식민지 수탈론, 식민지 근대화론, 탈근대론적 역사관을 넘어서자고 했던 제안이 울림을 주었던 것이다.
<식민권력과 한국농업>은 ‘식민지 근대화 논쟁’의 후속작이다. 주요 역사관들이 제기한 문제와 연구방법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식민농업토지정책사 연구로서, 근대화 논쟁의 핵심 영역인 식민농정사를 통해 전작에서 제시한 ‘장기근대사론’을 펼쳤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45년 해방 이전까지 일제의 농업토지정책을 중심으로 민족적·계층적 지배와 갈등, 한국 농업과 지주제의 변화 양상을 자세하게 살폈다.
시기를 나눠보면, 일본 인구가 늘면서 식량 문제에 빠진 일제가 농업식민지화 정책을 시행한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제국 정부 관료, 계몽운동 계열, 의병운동 계열은 각각 일본인의 토지 침탈과 이주식민에 저항하며 대응했다. 1910~32년, 일제가 지주 위주의 식민농정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시기는 좀더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일제는 한국의 미간지가 충분하고 인구가 적을 것이라 쉽게 생각했지만 병합 뒤 막상 조사해보니 한국의 토지개간은 상당한 수준까지 이르렀던데다 인구밀도도 추정치인 900만명보다 훨씬 많은 1300만여명으로 집계된 것이다. 이주식민지화 정책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마음을 바꿔 사회개량적 식민농정을 전개한 것은 1932~39년 사이다. 대공황의 여파 속에 농민운동이 일어났고, 소작쟁의까지 격화했던 것이다. 위기를 맞아 체제 안정과 농사개량을 동시에 꾀하려던 총독부는 1934년 조선농지령(요즘의 임대차보호법)을 공포했다. 일제가 본국보다 식민지 한국에서 먼저 시행한 농업관계법이었다. 일제가 가능하면 피하려 했던 이 정책은 일본인인 식민 지주와 한국인 농장형 지주들의 반발 속에서 총독부가 서둘러 내놓은 ‘당근책’이었다. 농민운동 등 사회운동이 민족운동과 결합해 사회혁명적 상황으로 발전할 조짐까지 보였기 때문이다.
1939년 대흉작을 거쳐 1940년대 전반 침략 전쟁의 확대로 인해 점점 궁지에 몰린 일제는 전시 식량 확보를 위해 증산, 공출, 농촌 노동력 강제동원 등 통제 위주 식민농정을 시행했다. 그러나 식민 체제 안정화를 무시하고 일제 본국의 요구에만 매달렸던 나머지 정책은 실패했다. 농민들의 저항과 반발이 심각하게 번졌고 1942~44년 쌀 생산은 연평균 343만6000석이나 감소했으며, 총경지의 4%나 되는 약 17만6200㏊의 농경지가 줄어들었다.
지은이는 일제의 식민정책이 그 전후 한국사 전개와 무관하게 돌출적으로 시행됐다가 사라졌다고 보는 ‘단기사적’ 시각을 지양했다. 예컨대 해방 뒤 남북한의 농지·토지개혁은 1920년대 이래 한국인 지주제가 위축된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농업개혁을 열망한 농민의 주체적 대응도 부분적으로는 계승되었다. 그러나 빼놓지 말아야 할 점은 일제가 시행한 식민농정에 따라 지주제가 통제된 뒤 그 연장선상에서 남한의 자작소농제나 북한의 국가통제 자작소농제가 형성됐다는 것이다. 식민농정은 해방 후 농지·토지개혁을 배태한 전사(이전의 역사)이기도 했다는 얘기다.
식민지 근대화 논쟁의 핵심이었던 기존 역사관들에 견줘보면, 지은이는 일제(권력과 자본)와 한국 사회·농민들의 민족적 갈등, 그리고 한·일 지주-농민 사이의 계급적 갈등을 훨씬 정교하게 살핀다. 한국 농촌과 농업을 중심으로 중층적인 분석을 촘촘히 해보면, 단순한 식민지 수탈론이나 식민지 근대화론, 탈근대적 역사관은 사실을 설명하는 독자적인 틀로서 모두가 부적합하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한국 사회와 농민의 주체적 대응의 ‘실체’를 밝히면서 이런 역동이 식민농정을 크게 수정·변화시켰다고 힘주어 말한다.
더욱이 한국 농업의 발전 수준과 농민 대응력, 곧 내재적 발전 수준은 당시 이미 상당히 성장해 있어 1910년대 초 부동산 등기제도 같은 일본의 근대 제도가 혼란 없이 시행될 수 있었던 점을 중요하게 꼽는다. 근대 민법 원칙에 따른 토지 소유권과 소작관계의 법제화는 전통사회 토지 소유권이 근대사회 배타적 소유권에 근접할 정도로 발전했기에 가능했다. 따라서 일제는 유럽 제국의 아프리카 식민 지배처럼 마음대로 한국을 지배, 억압, 수탈할 수 없었고 일제 본국의 요구와 다른 측면에서 체제의 안정화를 꾀해야 했던 조선총독부는 정책을 수정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식민정책은 일제에 의해 일방적으로 기획·시행되었던 것이 아니며 한국인은 식민정책의 대상으로만 머물지 않았다는 결론이다.
기존 식민지 근대화 논쟁의 시각들을 수정·보완하고 있지만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강조하는 ‘내재적 발전론’과 좀더 강하게 만나는 지점이 있어 보인다. 정 교수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한국 전통 농업의 발전 수준이 높아 일본의 근대 제도가 무리 없이 정착한 점을 본다면, 내재적 발전론의 기조를 수용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식민지 수탈론처럼 한국 쌀 일본 ‘반출’을 단순한 수탈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일제 말 식량 공출이 자행되기 전까지는 한국 쌀의 일본 ‘반출’이 식민지적인 경제적 메커니즘을 이용한 ‘수출’, 곧 ‘구조적 수탈’이라고 분석한다. “한국의 농촌·농민들은 지배만 당한 게 아니라 식민농정 수정을 이끌어내는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은이는 거듭 강조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정연태 지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4만3000원
<식민권력과 한국 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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