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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생활인의 비애를 진솔하게 기록하다

등록 2014-09-14 20:02

이재무 시인
이재무 시인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이재무 지음
실천문학사·8000원

이재무(사진)의 열번째 시집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는 생활인의 비애를 진솔하게 기록한다. 1983년 등단 선물로 받은 만년필로 그는 “의식을 거행하는 사제처럼 엄숙하게 촉에서 흘러나오는 핏방울로 원고지 칸칸을 적셔나갔”으며 “순금의 언어를 캐는 지하 갱도의 곡괭이”가 되어 미학적 쟁투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만년필이 “가볍고 경쾌”한 볼펜으로 바뀌면서 “쓰기에 속도가 붙고 구겨진 생활도 점차 펴지기 시작했”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나를 속이고 굴절시키고 터무니없이 과장했다”. 볼펜이 컴퓨터로 바뀌면서는 상황이 더 끔찍해졌다. 그가 자판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판이 “나를 두들겨대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지만 자판의 타격이 “예전처럼 아프지 았았다./ 때 묻어 얼룩덜룩한 이름이 세상을 떠돌 때 아랫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이상 <몽블랑>).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만년필이 볼펜을 거쳐 컴퓨터 자판으로 바뀐 삶이 고민 없이 안락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재무의 시가 타락했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시인이 그만큼 시 앞에 정직하다는 증거로 이 시는 읽혀야 한다.

“도시는 분노를 키우는 학교였다/ (…) / 더 이상 범람할 줄 모르는 한강은/ 흐르는 시간보다 고여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 / 한여름에는 강 안쪽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썩은 내가 떼 지어/ 스멀스멀 강둑을 향해 기어오르고 있었다”(<다시 한강에서> 부분)

“이런 날 나는 물그릇에 밥을 말아 먹는다/ 흰 대접 속 희멀쑥한 얼굴이 떠 있다/ 나는 나를 떠먹는다/ 질통처럼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없어진 얼굴로 현관을 나선다/ 밥 벌러 간다”(<나는 나를 떠먹는다> 부분)

분노와 부패가 지배하는 도시에서 ‘비정규직’인 시인은 익명의 가장으로서 밥벌이 전선에 내몰린다. 익명이 수반하는 무명과 수치가 자책의 극한으로 치달을 때 “못된 생각에 골몰하는 나 같은 놈들을// 패대기쳤으면 좋겠다”(<몽롱한 것은 장엄하다>)는 파괴적 상상력으로 치닫고, 그것이 내면으로 가라앉아 맑아질 때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슬픔에게 무릎을 꿇다>)는 고백을 자아낸다. 분노와 수치, 슬픔과 지혜를 두루 아우른 끝에 시인이 되찾은 진짜 얼굴은 아마도 이런 것이리라.

“주름 가득한// 더운 날 부채 같은// 추운 날 난로 같은// 미소에 잔물결 일고// 대소에 밭고랑 생기는// 바람에 강하고// 물에 약한 창호지 같은// 달빛 스민 빈방 천장 같은// 뒤꼍에 고인 오후의 산그늘처럼// 적막한// 공책에 옮겨 쓴 경전 같은”(<얼굴> 전문).

글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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