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3월 통영 호심다방에서 열린 4인전 당시 이중섭. 이중섭과 함께 4인전에 참여했던 공예가 유강렬의 유품으로 처음 공개되는 사진이다.
관련문헌 150여종 선별해 검증
환상만 남은 이중섭 실체 추적
환상만 남은 이중섭 실체 추적
<이중섭 평전>
최열 지음
돌베개·4만8000원 우리는 이중섭(1916~1956)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그림을 사랑한다(고 느낀다). 화가 이중섭을 향한 우리의 애정은 언제부터 비롯한 것일까. 미술평론가 최열의 <이중섭 평전>은 그 기원을 찾아 떠난다. 40여년에 불과한 이중섭의 일생은 그의 그림만큼이나 역동적이다. 평안북도 평원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 영재였고, 일본 유학 시절 만난 후배 야마모토 마사코(한국이름 이남덕)에게 매일같이 그림엽서를 보낸 끝에 극적인 결혼에 성공한 국제연애의 주인공. 전쟁을 거치면서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뒤 평생을 미치도록 그리워했으나 끝내 함께 하지 못한 순애보의 사내, 처절한 가난에 시달리며 거식증과 정신분열증을 앓다가 ‘무연고자’ 신세가 되어 간염으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화가였다. 살아있을 때 기껏해야 “화단의 이채” 정도였던 언론의 평가는, 그의 서러운 삶이 다하고서야 “우리 화단의 귀재”, “요절 천재”로 뛰어올랐다. 망자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대함과 드라마틱한 인생유전이 이중섭의 신화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줬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대중적 인기가 높아지자 그가 과대평가되었다며 격하 운동이 일부 있었으나 워낙 압도적인 여론 탓에 쏙 들어가 버렸다. 지은이는 찬사뿐 아니라 일방적 험담에 가까운 글들까지 고스란히 옮겨놓는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서문에서 “최초의 목적은 ‘사실로 가득 찬 일대기’였다. (…) 전기작가들이 꿈꾸는 평전 그 이상에 도전했다. 정전(正典), 다시 말해 ‘이중섭 실록’을 완성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였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약 500종에 이르는 이중섭 관련 문헌 가운데 150여종을 선별해 검증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그림 세 점이 뉴욕 근대미술관(MoMA)에 전시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중섭이 “내 그림 비행기 탔겠네”라며 특유의 활달함을 과시했다는 증언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지은이는 밝힌다. 이중섭의 작품을 소장하기로 했다는 미술관 쪽의 인증서가 기증자인 아서 맥타가트(당시 대구 미국문화공보원 원장)에게 전달된 것은 이중섭이 세상을 뜬 이후라는 것이다. 이 그림들은 평생을 그림 재료 부족에 시달린 이중섭이 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이른바 ‘은지화’였다. 평북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오산고보) 재학 시절 이중섭과 친구들이 저질렀다는 방화사건을 추적하는 지은이의 자세는 거의 탐정 수준이다. 관련 저술뿐 아니라 당시 일간지 기사까지 뒤져 정말 이중섭 등이 불을 낸 것이 맞는지 따져 묻는다. 이중섭을 다룬 대표 저작인 시인 고은의 <이중섭 그 예술과 생애>(민음사, 1973)도 주요 반박 대상이다. 그렇다고 지은이가 이중섭의 예술 세계를 폄하하려는 건 전혀 아니다. 굳이 말하면 그는 이중섭의 성취를 높게 평가하는 쪽이다. 그는 “실체는 사라졌고 환상만 남았다. 그렇게 퍼져나간 인간 이중섭의 얼굴은 천 개의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했고, 화가 이중섭의 예술 세계에 대한 평가는 찬사와 비난을 오갔다. 이처럼 혼란스러울 때마다 미술계 사람들은 신화의 늪에 빠진 이중섭을 구출해야 한다고 했지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자신이 나섰다는 것이다.
이중섭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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