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자테크(JATEC) 활동가였던 세키야 시게루(66)
베트남전 파병 50주년을 맞아 역사문제연구소는 지난주 ‘베트남 전쟁, 다양한 경계넘기’‘베트남전과 아시아의 상상력’ 등의 이름으로 영화상영, 학술회의 등 다양한 접근을 시도했다. 그 가운데 25일 베트남전 탈영병 지원 활동과 관련한 ‘전쟁 거부를 가능케 한 사람들’ 강연에는 젊은 반전평화운동가들이 다수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강연자는 일본 자테크(JATEC) 활동가였던 세키야 시게루(66·사진). 자테크는 ‘반전 탈주 미군병사 원조 일본기술위원회’ 약자로서,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던 미군 탈영병을 비밀리에 숨겨주고 망명을 돕는 단체였다. 1998년 <이웃에 탈영병이 있었던 시대-자테크, 한 시민운동의 기록>이라는 책이 일본에서 나오며 널리 알려졌다.
강연 뒤 <한겨레>와 만난 세키야 시게루는 “당시 일본은 원폭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우리는 아시아의 가해자, 베트남전의 가해자라는 문제의식 속에 반전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1967년 10월부터 1974년까지 꾸준히 자테크에서 활동한 보기 드문 인물이다. 재수생 때 이 조직에 들어가 대학생이 된 뒤에도 미군들 여럿을 숨겨주는 일을 했다. 반전카페를 열기도 하고,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다 몇 년 전 퇴직했다.
“자테크는 탈영병을 숨겨주는 ‘인민의 바다’였다. 전공투같이 드러내놓고 하는 학생운동과는 공식적으로 거리를 뒀고, 초등학생부터 할머니까지 가담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실제 학생과 여성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조직의 ‘모태’는 1965년 창립한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평련, 베헤이렌)이었다. 열린 시민 반전운동 단체로서 정당, 조직, 본부, 강령 등이 없었으며 큰 뜻에 동의하면 누구나 베평련 이름으로 데모를 할 수 있었다. 도쿄 베평련 주최 집회는 50명에서 때로는 5만명까지 모여들었고, 1969년엔 전국적으로 약 360만명의 베평련 회원이 있었다고도 한다.(오구마 에이지 <사회를 바꾸려면>) 미군 탈영병들이 생기자 이들을 숨겨줄 필요가 있었고, 베평련 가운데 몇몇이 ‘자테크’라는 조직을 따로 꾸리게 됐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 미국의 반전평화 활동가들과 연계했고, 프랑스 유학파가 유럽에서 배워온 여권 위조 기술로 탈영병들을 외국에 보내기도 했다. 1968년 1월부터 1971년 7월까지 40명의 탈영병을 지원했고, 19명을 출국시켰다. 나머지 5~6명은 체포되었고 다른 이들은 상담 뒤 기지로 돌아가기도 했다.
“우리는 미군을 가해자만이 아니라 미국 안의 서민으로서 전쟁터에 설 수밖에 없는 피해자로 보았다. 군대는 베트남 사람뿐 아니라 모든 군인 한명한명에게도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진수라는 한국인 출신 미군병사는 세키야 시게루의 기억에 특히 남는 사람이다. 그는 전쟁에 반대해 1967년 4월께 쿠바대사관으로 숨어들었고 9개월 뒤 자테크에 비밀리에 넘겨져 숨어지내다가 이듬해 스웨덴으로 망명했다.
“동양계였기 때문에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기도 했다. 베트남전에서 번 돈을 본인을 위해 쓸 수 없다며 밥값을 자기가 냈다. 말하기보다 글쓰는 것이 맞았던 그는 편지와 성명서를 많이 썼다.”
인적·물적으로 탈영병들을 돕고 망명 루트를 개척하는 데 한계를 느꼈던 자테크는 활동 후반기엔 미군 내 반전운동을 지원하는 활동을 주로 했다. 당시는 미군 안에 반전분위기가 확실히 있었기 때문에 휴가나 외출을 나온 미군들이 직접 반전연설을 하면 이를 녹음해 기지 앞에서 틀어주었고, 이들이 반전신문을 만들면 인쇄와 배포를 맡았다. 탈영을 원하는 미군들을 상담하고 징병기피나 제대신청 등을 도왔다.
“국가가 관리하는 ‘틈새’가 있다. 국가 권력으로 보자면 ‘텅 빈 공간’이지만 우리한테는 ‘살아갈 공간’이었던 셈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국가불복종과 직접행동을 해나갔다. 50년이 지났고 자테크 활동은 끝났지만 한일 양국에서 반전평화운동에 대한 젊은이들의 관심을 만나보게 된다. 한국의 활동가들에게도 지지를 보낸다.”
글·사진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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