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잃은 퇴역탐정 통해
프랑스의 아픈 현대사 그려
프랑스의 아픈 현대사 그려
시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파트리크 모디아노의 소설은 늘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져간 과거의 애틋한 흔적을 되살리는 데 바쳐진다. 그의 많은 작품이 번역 소개됐고 국내 작가들에게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현대 프랑스문학이 길어올린 가장 큰 성과 중 하나라고 평가받는다. 프루스트가 말한 존재의 근원으로서 ‘잃어버린 시간’을 특유의 신비하고 몽상적인 언어로 탐색하는 이 소설은 그의 다른 많은 작품이 그러하듯,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는 여정을 그렸다. 흥신소에서 일하는 퇴역 탐정인 주인공은 조악한 실마리 몇가지에 의지해 마치 다른 인물의 뒤를 밟듯 낯선 자신의 과거를 추적한다.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태어나 과거를 상실한 세대로 자란 모디아노는 이 책을 통해 ‘기억상실’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비극적 현대사의 한 단면을 명징하게 드러냈다는 평을 받았다. 작가 전경린은 이 소설이 “불안정한 허기와 즉흥적이고 공허한 충동들,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혼란스러운 질료에 불과한 스무살의 내 삶과” 일치했노라고 고백한 바 있다.
2005년작 <혈통>이 대표적으로 자전적인 작품이라면, 나치 점령 시대 홀로코스트의 희생자가 된 파리의 열다섯살 소녀를 모델로 삼은 소설 <도라 브루더>는 독일 점령기를 다룬 대표작이다. <도라 브루더>의 주인공은 어느 날 우연히 옛날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열다섯살 소녀의 실종 기사를 발견하고 역사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한 소녀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이 소설의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단문들, 전쟁의 폭력을 무력하게 하는 청춘의 아름다움에 대한 애잔한 묘사는 지워지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
이밖에, 언제나 일인칭 남성 화자의 목소리로 말하던 그가 처음으로 여성 화자를 내세운 <신원 미상 여자>, 유년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려는 한 소녀의 성장기를 그린 <작은 보석>, 한밤중에 일어난 의문의 차 사고를 매개로 한 남자의 쓸쓸하면서도 모호한 기억 속 풍경을 세밀한 언어로 복원해내는 <한밤의 사고> 등이 국내에 소개돼 있다.
이재성 기자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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