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지음
민음사·9000원 “시가 차오를 때면/ 응!/ 야성의 호흡으로 대답했다.// 어느 땅, 어느 년대에도 없는/ 뜨겁고 새로운 생명이기를.” 열두번째 시집 <응>에 붙인 ‘시인의 말’에서 문정희(67) 시인은 이렇게 쓴다. 요컨대 이 시집은 “야성의 호흡”과 “뜨겁고 새로운 생명”의 노래라 할 수 있겠고, ‘응’은 그것들을 한마디로 응축한 말이라 하겠다. ‘야성’과 ‘생명’이라는 열쇳말은 유명한 여성 심리학 책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을 떠오르게도 한다. 이 시집에는 <늑대 여자>라는 시도 들어 있거니와, 문정희의 시들을 늑대 여자의 울부짖음으로 새겨들을 수도 있겠다. “어머니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는 도발적인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 <강>을 보라. “드디어 딸을 벗어 버렸다!/ 고려야 조선아 누대의 여자들아, 식민지들아/ 죄 없이 죄 많은 수인들아, 잘 가거라/ 신성을 넘어 독성처럼 질긴 거미줄에 얽혀/ 눈도 귀도 없이 늪에 사는 물귀신들아/ 끝없이 간섭하던 기도 속의/ 현모야, 양처야, 정숙아,/ 잘 가거라.”(<강> 부분) <이방인>의 뫼르소는 어머니 장례를 치른 날 여자와 잠을 잤다는 이유로 법정에서 곤경에 처하지만, 문정희 시의 화자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그 이름으로 강요되었던 식민지적 억압과 오랜 관습의 폐해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계기로 다가온다. “죄 없이 죄 많은 수인들”이란 그 자신 가부장제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그 굳건한 기둥 노릇을 자임했던 전통적 어머니들을 가리키는 표현이겠다. 이 시에서의 성욕은 ‘시인의 말’에 나오는 ‘생명’의 다른 말일 터인데, “불쌍한 어머니, 그녀가 죽자 성욕이 살아났다/ 나는 다시 어머니를 낳을 것이다”라는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새로운’ 어머니/여자/생명의 탄생을 향한 강렬한 열망을 드러낸다. <강>이 여성의 억압과 해방에의 지향을 노래한 시라면, 이 시집에는 여성 ‘시인’으로서의 질곡과 고뇌 그리고 독립 의지를 나타내는 작품도 여럿 들어 있다. “나의 펜은 페니스가 아니다/ 나의 펜은 피다”(<나의 펜>)를 비롯해 “여시인으로 사는 것은/ 몸 없이 섹스를 파는 것인지도 몰라”(<여시인>)라거나 “입술에 묻은 핏빛 슬픔과/ 검은 고독으로/ 시를 쓴다”(<조장(鳥葬)>) 같은 구절들이 대표적이다. “시인 M이 뚱뚱한 것은 고독을 과식한 탓이다/ 슬픔을 쉴 새 없이 갉아먹은 탓이다/ 자유는 혼탁하고 말에는 고통이 섞여 있어/ 동굴 속에서 홀로를 파먹은 탓이다”(<뚱뚱한 시인> 부분) “나는 나이테 없는 식물 같은 동물/ 피 다 증발해 버린 빙하기를 사는/ 독거의 꽃”(<독거> 부분) 1969년에 등단했으니, 고독과 슬픔과 고통을 자양분 삼아 시인으로 살아오기 어언 45년. 얼마 전 전통의 한국시인협회장 자리에 오르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독거의 꽃”을 자부한다. 그가 시인인 한 그에게는 언제까지나 “나하고 나하고 나뿐”(<독거>)이기 때문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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