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학·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씨. 그는 “헌책방에 매일 들러 책을 사고, 사람들에게 주는 것도 좋아한다”고 했다. 이날도 여행 트렁크 가득 책을 담아 왔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여성학·평화학자 정희진 인터뷰
‘페미니즘의 도전’ 뒤 9년 만에 신간
젠더부터 평화까지 79권 책 읽기
“정치적 전선 이동이 내 관심사”
‘페미니즘의 도전’ 뒤 9년 만에 신간
젠더부터 평화까지 79권 책 읽기
“정치적 전선 이동이 내 관심사”
정희진 지음/교양인·1만5000원 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정희진(47)씨가 새 책을 냈다. 9년 만이다. <정희진처럼 읽기>는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쓴 ‘독후감’을 묶었다. “그동안 글은 매일 200자 원고지 기준 10장 이상 썼다. 끄적거려 둔 원고도 5000장 정도 갖고 있다. 다만 책을 묶지 않았던 것이다. 개인 사정도 있었고, 책을 내기 싫었다.” 책 뒷날개에는 앞으로 낼 책 제목들이 나열돼 있다. <정희진처럼 쓰기>, <탈식민주의 한국 현대사>, <평화학 입문>, <지구화 시대 자주 국방과 탈식민주의> 등 모두 7권이다. 이를 두고 박태근 알라딘 엠디는 페이스북에 “교양인 출판사와 정희진 선생님의 기개”라고 평했다. “진정한 배수의 진”, “정희진처럼 말하기도 재밌을 텐데” 하는 댓글이 여러건 달렸다. 관심이 높다. 거의 10년 만에 기지개를 켜는 것인지,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을 때도 그는 곧이어 나올 책인 <정희진처럼 쓰기>를 쓰고 있었다. 전작인 <페미니즘의 도전>(2005)은 페미니즘 관련 서적으로는 드물게 14쇄를 찍으며 지난해 개정증보판을 냈다. 2012년 출판인들이 직접 뽑은 ‘함께 읽고 싶은 100권의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책은 <한겨레>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가운데 79편을 묶었다. 그는 책 읽는 것이 좋다고 했다. 대체 왜 읽을까. “누구나 몸이 아프거나 기분이 상할 때 혹은 고통으로 인한 죽음 직전에도 책을 읽으면 위로받는다.” 그에게 책은 “약, 참고문헌, 일상”이다. 이번 책은 그렇게 읽은 ‘책들에 대한 책’이다. “우리 집은 작은 서점에 가깝다. 매일 하루 5~10권 정도 책을 산다. 온라인 서점에서 한때 ‘플래티넘’ 회원이었다.(웃음) 새 책도 사지만 동네 헌책방 3곳을 주로 이용한다. 박목월 시인이 쓴 육영수 전기, <백범일지> 초판, <근대성의 초극> 일본어 초판 같은 것도 운좋게 발견할 수 있다.” 이번 책의 앞부분에 그는 ‘좁은 편력’이라는 글 한편을 따로 써서 실었다. 어려서부터 어떤 책에서 자극과 충격을 받았으며 그 뒤 어떻게 생의 서사가 변화했는지 솔직히 밝혔다. 좋아하는 책은 “여운이 남고,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며, 괴롭고, 슬프고, 마침내 사고방식에 변화가 오거나 인생관이 바뀌는 책”이다. “그런 책은 여러번 베껴 쓴다. 번역서는 원서를 구해 필사한다. 최소 네번 정도는 읽게 되고 읽을 때마다 다른 주제가 나타난다. 완전히 내 것으로, 내 몸의 일부로 만드는 과정이다. 책을 볼 때 줄 치는 것은 좋지 않게 생각한다. 더럽혀지니까. 책의 중요 구절은 외운다. 인식이 있으면 저절로 외워진다.” ‘절실한 필요’ 때문에 책을 읽듯,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이번 책 한줄 한줄 ‘빈말’ 아닌 글쓰기를 한 흔적이 뚜렷하다. 책이 몸을 통과하고, 그 뒤 변화한 몸으로 글을 쓴 것이다. “고통에 관심이 많다”는 사람답게 1장의 제목부터가 ‘고통’이다. 첫 독후감은 이청준의 <벌레 이야기>로 잡았다. 고통, 평화, 용서를 놓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마구 뒤엉키는 영화 <밀양>의 원작이다. 이 책에 대한 느낌은 이렇게 끝맺었다. “평화가 할 일은 그 짐을 제자리로 옮기는 고된 노력이지, 평화 자체를 섬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을 가리켜 ‘평화학 연구자’라는 말을 굳이 쓰는 것은 그 또한 ‘평화’에 대한 개념을 놓고 경합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평화를 갈등 없는 상태나 갈등 조정, 분노하면 안 된다고 보는 것은 ‘평화의 계급성’을 드러내는 부르주아지들의 판타지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굉장히 정치적으로 ‘평화학 연구자’로 표현한다. 평화의 개념을 놓고 투쟁하고 싶었다.” 그는 어떤 평화운동가, 구도자, 힐러들이 말하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라며 분노하다시피 말했다. 전문가연하는 사람들은 그 분야를 독점하려고 벽을 쌓지만, 사실 지식과 인식은 부족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에게 전문가란 정보가 아니라 관점에 대한 문제와 연관된다. “기존 전선에서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전선을 옮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사실은 ‘정치적 전선의 이동’이 나의 관심사다. 기존의 논쟁 구도를 이동시키는 게 원래 내가 하고 싶던 일이다. 진보나 보수 모두 집에서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 그게 정말 사소한 일일까? 기존 논쟁 구도가 특정 사람의 처지에서 구성된 것이 과연 사소한 걸까?” 전선을 옮기는 건, 완전히 틀 밖에서 보아야만 가능하다. 책을 읽어서 관점이 바뀌면 깨닫게 되고, 이동하게 되고, 권력이 두려워하는 인간이 새로 탄생한다. 여성단체에서 한국 현대사를 강의하는 것도 그래서다. “정통성 논쟁, 팩트 논쟁이 아니라 서발턴(하위 주체)의 경험에서 현대사의 논점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이번에 묶어낸 79편의 ‘독후감’ 가운데 그는 <천자문> 편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했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위어조자 언재호야(謂語助者 焉哉乎也)’다. “996자를 알아도 마지막 네 글자 조사를 모르면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문장은 결국 조사의 기술(art)이다. 조사는 의미와 권력이 없다. 하지만 의미와 권력을 조직화하는 데 필수적이다. 나는 그 말에 압도되었다. 조사는 주변성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런 사람이 없으면 꼼짝할 수가 없다. 그것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