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서점업계 ‘폭풍 전야’
열흘 앞으로 다가온 새 도서정가제 시행을 앞두고 출판·서점업계가 기대와 불안 속에 출렁이고 있다. 대형 온라인서점들이 법 개정을 이벤트 삼아 정가의 최대 90%에 이르는 ‘폭탄 세일’ 행사를 벌이면서 책 수매 수요를 빨아들이는 블랙홀 현상은 몇달째 계속되고 있다. 대부분의 출판사들과 동네서점들은 “단군 이래 최대 불황”이라며 비명을 지르고 있다. 새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 이런 문제들이 사라질까. 독자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두 차례에 걸쳐 실태와 대안을 점검한다.
새책 거의 안 팔려 출판사 ‘울상’
오프라인 매장 내며 공세도
동네서점, 정부 시행의지 불신 탓
‘무늬만 정가제’ 될까 불안감 커 “요즘 동료 출판사 사장들을 만나면 다들 죽겠다는 소리만 합니다. 새 도서정가제 시행을 앞두고 쏟아지는 ‘폭탄 세일’로 새 책이 거의 팔리지 않고 있거든요. 문제는 법이 시행되는 21일 이후에 상황이 나아질까 하는 점인데, 과연 잘 될까 다들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직원 10여명의 한 중형 출판사 사장은 요즘 출판계 분위기를 이렇게 전했다. 책의 문화적 특수성을 감안해 책을 시장의 무한경쟁 논리에 맡기지 않고 적정한 규제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따라 새 도서정가제가 만들어졌지만, 오히려 출판시장의 붕괴를 재촉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도서정가제의 직접적 영향 아래에 있는 동네 서점들은 온라인서점과 대형서점들이 법망을 피해 어떤 변칙 마케팅 전략을 쓸지 더욱 긴장하고 있다. 특히 최근 대형 온라인서점들이 오프라인에 매장을 내자 오프라인 서점시장 진출 아니냐며 강력히 비판하고 있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서련)는 최근 온라인서점 인터파크가 명동성당 가톨릭회관 신관 지하1층에 개점한 도서 대여점 ‘북파크’를 동반성장위원회에 고발했다. 명목은 도서대여점이지만 편법으로 종이책을 할인판매하고 있으며, 이는 ‘중소기업 적합업종’ 권고 기준을 어긴 행위라는 것이다. 온라인서점 업계 1위인 예스24가 지난달 말 서울 강남구 9호선 신논현역 지하1층에 새로 낸 전자책 서점 ‘크레마 라운지’도 저의를 의심받고 있다. 양수열 서련 정무위원은 “시장 포화상태로 매출이 정체되고 있는 대형 온라인서점들이 새 정가제 시행을 계기로 시장 점유율을 더욱 높이기 위해 시도하는 새 판로 개척”이라며 고사위기의 동네서점들을 더욱 옥죄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불안감만 있는 건 아니다. 분명 기대와 희망의 싹도 트고 있다. 예컨대 비록 4%포인트에 지나지 않지만 할인폭 축소는 할인 경쟁력에서 뒤질 수밖에 없는 중소출판사와 동네서점들에겐 좋은 소식이다. 현행 도서정가제는 정가의 최대 19%까지 할인(가격 할인 10%+판매가의 10%에 해당하는 쿠폰·마일리지 제공 등의 간접할인)할 수 있으나 새 정가제에선 할인율이 15%를 넘지 못한다. 특히 정가제 적용 예외도서 대폭 제한은 동네서점에겐 큰 희소식이다. 이제까지 할인 제한이 없던 구간 도서(출간한 지 1년6개월이 지난 도서)들도 할인율 15% 상한제 적용을 받지만 정해진 절차를 거쳐 정가를 다시 매길 수 있다. 또 정가제 대상에서 아예 제외됐던 실용서, 초등 학습참고서, 도서관·공공기관(사회복지시설 제외) 구입 도서들도 모두 정가제 적용대상에 포함된다. 독자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새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면 현재 평균 1만4678원인 책 1권 가격이 평균 220원 정도 더 올라갈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5일 새 정가제 시행 관련 설명회에서 김희범 문화체육관광부 제1차관은 현행 도서정가제가 “할인율이 너무 높고 적용 예외도서들이 많은 무늬만 정가제”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새 정가제로 가격 거품이 빠지고 출판 생태계가 정상화돼 출판계와 소비자 모두가 득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할인을 염두에 두고 높은 가격을 책정하는 거품 현상이 사라지게 되면 결국 독자들에게도 이익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중소 출판·서점들은 약자를 더욱 궁지로 모는 온라인서점들의 자의적인 도서 납품가(공급가) 방치, 새 정가제로 늘어날 이익을 독식할 가능성이 큰 온라인서점과 한국교육방송(이비에스) 등의 ‘슈퍼 갑’ 횡포에 대한 정부의 무대책을 집중적으로 성토하고 있다. 지난달 중순 출판계와 서점업계가 공동으로 공청회를 열어 시행령 개정을 촉구하자 문화부는 부랴부랴 업계 쪽과 협의회를 열고 시행령 개정 요구를 전폭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6~7개의 개정 요구 가운데 바로 수용한 것은 거의 없고, 대부분 법제처 및 규제개혁위원회 법령해석 심사, 온·오프라인 서점간 합의 필요, 시행령 추가 개정 노력 등을 이유로 최종결정을 추후 과제로 넘겼다. 이런 분위기 속에 대한출판문화협회·한국출판인회의·학습자료협회·한국서점조합연합회·온라인서점협의회와 정부 쪽의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12일 함께 발표하기로 합의한 ‘도서가격 합리화 자율협약’이 업계 쪽의 보이콧 움직임으로 무산될 위기를 맞고 있다. 정부의 시행의지가 여전히 불신받고 있는 것이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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