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 계원예대 교수는 “정치의 조건으로서 노동에 대한 범주를 계속 얘기해야 한다”며 “인간-시민이란 범주의 등 뒤에는 항시 노동이란 유령이 붙어다닌다”고 했다. 꾸리에 제공
5년만에 새 책 낸 서동진 교수
지배받는 주체→ 투쟁하는 주체
‘두 제곱’으로 사유해야 ‘세계’ 보인다
지배받는 주체→ 투쟁하는 주체
‘두 제곱’으로 사유해야 ‘세계’ 보인다
서동진 지음/꾸리에·1만5000원 ‘빨간 책’ 한권이 막 나왔다. 서동진 계원디자인예술대 융합예술학과 교수가 5년 만에 쓴 단독 저서다. 그는 1990년대를 풍미한 스타 문화비평가이자 논객이었고 2009년엔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한 책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돌베개)로 학계에 진동을 일으켰다. 신자유주의 한국 사회의 자기계발적 주체 탄생을 처음으로 분석해 연구자들 사이에서 그의 이론이 대유행했고, 심지어 그와 비슷한 유의 논문을 쓰는 이들을 가리켜 “자기계발학파”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이번 책 <변증법의 낮잠>에 붙은 부제는 ‘적대와 정치’다. 마르크스주의의 특장인 모순, 변증법, 적대라는 키워드로 정치와 경제의 관계를 사유했다. 포켓북처럼 아담한 만듦새는 예쁘지만 겉도 속도 ‘빨간 책’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란 무엇이며 어떤 인민이 있어야 하는지’ 화두를 던지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동안 쌓인 내 갑갑증을 해소하려는 생각이 컸다. ‘여보세요, 저는 아닌 것 같아요’라는. 바보, 교황, 블로거들도 모두 자본주의를 미워하는 시대다. 일베, 티파티, 탈레반도 세상을 거부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좌파들은 ‘부정’을 할 줄 모른다.” 물론 세상을 거부한다고 세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부정이란, ‘세계’가 왜 그런 방식으로 ‘나’에게 나타나는지 보는 것이다. 인민은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로 스스로 주체화하지 못한다. 이때 중요한 건 “자신을 자유로운 주체로서 만들어내지 못하도록 만드는 힘”을 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방해와 좌절을 규명하는 것이 유물론적 사고다. 변증법적 부정을 통해 ‘두 제곱’으로 사유해야 ‘세계’가 보인다. 자본주의에 모순이 왜 없겠는가. 눈부신 변화와 발전 탓에 은폐되는 것이 문제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되돌아오는 것”이 모순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적대”가 바로 정치가 자리해야 할 장소다. 그렇다면 정치엔 경제가 결부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문제는 경제야”라는 말이 옳을까? 경제가 정치에 선행하는 걸까? 둘은 종합될 수 있나? 그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경제는 정치가 스스로를 만들어내도록 한다”는 것이다. 경제의 내적 모순을 다른 갈등으로 탈바꿈하는 것이야말로 박근혜 정권의 쟁점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못 가진 자들이 가진 자의 정권을 신뢰하는 것은 불가해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이기에 당연하다. 이런 복잡한 곤경을 해결하자면 경제와 정치 영역 두 영역에서 싸움을 감행해야 한다. 우선은 “가장 무관심한 것으로 전락한 정치”를 되살려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 책은 격월간지 <말과 활>에 실은 연재글을 모았다. 첨삭을 거듭해 공을 들였다는데, 적잖은 논란이 예상된다. ‘행복’을 정치적 슬로건으로 보는 점이나, ‘애도의 공동체’를 강조하는 좌파들에 대한 비판, 감정 사회학이나 ‘××사회’라는 사회학적 유행어에 대한 질타도 빼놓지 않았다. 이런 탈정치화의 논의에 그는 상당히 오래 불편해했던 것 같다. 좌파가 가진 인식론에서 ‘세계’에 대한 사유가 뒤로 물러나는 것을 경계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전능한 힘에 대해 비판해오다가 갑자기 세월호 참사 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터져나왔다. 광우병 촛불집회부터 지금까지 매 사건마다 ‘세계’는 없고 ‘비극’만 존재한다. 주관성의 과잉이다. 지식인 사이에서 ‘파국의 유물론’ 같은 유치찬란한 철학적 선언, 요설이 난무한다. ‘희망버스’ 같은 기획의 선의와 열정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선의와 의지로 세상을 바꾸자는 것은 허무맹랑하다.” 비극에 몰두해 정치와 윤리의 관계가 왜곡되는 한, 집단적·사회적 주체 또는 계급으로도 ‘인민’은 재현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이후’ 세계를 조직하는 ‘정치’에 대한 사유도 뒤로 물러난다. 그는 대안적 기획인 돌봄 경제 같은 ‘작은 사회’는 선의와 달리 ‘사회’ 자체를 제거해버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신자유주의가 ‘사회’를 파괴한 방법과 의도는 다를지라도 결과는 비슷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사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 이 분열을 어쩌면 좋은가? 그의 답답함은 비난보다 반성을 촉구하는 것에 가깝다. “‘어떻게 하면 내 삶을 관리할 수 있을까’ 하고 스펙을 쌓아 자기계발하는 노동자가 계급에 대한 사유를 할 수 있을까? 다른 주체가 탄생할 가능성이 있는지 묻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은 나 자신을 독자로 한 비망록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전작에서 ‘지배받는 주체 탄생’을 분석한 데 이어, ‘투쟁하는 주체 탄생’으로 질문을 옮기는 길잡이다. ‘세계’와 ‘사회’를 사유하자고 선동하는 팸플릿이다. 따라서 이 문건은 그의 날렵한 지식인 이미지를 소비하려는 특정 독자나 예술적 취향을 따르는 이들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그는 “크고 보편적 질문을 고독하게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사고는 허구적이지만 ‘보편적 세계’ 안에 ‘멤버십’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행위 중 하나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세계 시민의 일원임을 증명한다.” 적대와 정치를 사유하라, 변증법의 낮잠을 깨우라고 그는 말한다. 냉소적이나 열렬하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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