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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은 약자의 방패인가 강자의 창인가

등록 2014-12-11 22:07

정치인들은 정당한 질문에 답변을 거부하는 대신, 되받아치는 전략을 쉽게 쓴다. 사진은 지난 2005년 7월 당시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회의 한 장면. 종이에 “왜 이것만 공개했는가” “어떤 의도냐”고 적혀 있다. 전형적인 ‘비판 면역 전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정치인들은 정당한 질문에 답변을 거부하는 대신, 되받아치는 전략을 쉽게 쓴다. 사진은 지난 2005년 7월 당시 한나라당 상임운영위원회의 한 장면. 종이에 “왜 이것만 공개했는가” “어떤 의도냐”고 적혀 있다. 전형적인 ‘비판 면역 전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민주주의 훼손되면 유행
정당한 비판도 함께 휘발
음모론의 시대
전상진 지음
문학과지성사·1만3000원

‘음모론’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어두운 바닷 속 거대한 빙산처럼 무언가 음험한 이면이 있을 것 같다. 음모론은 ‘괴담’에 머물 수 있지만 영화처럼 ‘사실’이 되기도 한다. 지역, 성별, 나이, 학력을 막론하고 누구나 음모론자가 될 수 있다. 매혹만큼이나 혼란스럽다.

그동안 세대 문제와 자기계발 붐 등 다양한 사회현상에 대해 꾸준히 논문을 발표해온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가 첫 단독 저서로 <음모론의 시대>를 내놓았다. 사실인 듯 아닌 듯,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복잡한 담론, ‘음모론’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는 음모론을 비판하거나 두둔하지 않는다. 다만 음모론이 누구한테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쓸모’를 규명한다. 음모론이 유행하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제어장치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특히 한국에서” 권력의 전횡과 독주를 막는 감시와 비판은 “무기력한 상태”라는 것이다. 공적인 절차가 유명무실해지고 민주주의가 훼손당한 상태에서 음모론은 더욱 자극받는다. 따라서 음모론의 유행은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위협받는다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지은이가 선택한 이론적 배경은 막스 베버의 신정론(神正論)이다. 이는 고통, 악, 죽음과 같은 현상을 신에 의거해 정당화하려는 믿음 체계를 가리킨다. 과거 신정론이 기대와 현실의 간극을 문화적으로 채우려는 노력이었다면, 종교나 정치 이데올로기가 현실의 고통을 설명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음모론은 “세속적 신정론”이 된다. 음모론이 ‘적’을 만들며 기대와 다른 ‘나’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위로한다는 것이다. (약자의 경우) 왜 착하게 살아온 내가 고통받는가? (권력자의 경우) 나는 애쓰고 있는데 왜 이런 나를 몰라주고 비난하는가? 질문을 던지는 위치에 따라 ‘음모론’은 다르게 구성된다. 대개 힘센 쪽의 주장이 ‘공식 견해’가 되고 약한 쪽의 주장이 ‘음모론’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상대의 주장을 ‘음모론’이라고 ‘정의’하고 ‘낙인’찍을 수 있는 자들은 권력 집단이다. 비판자의 물음에 참이나 거짓으로 답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의혹이 불거졌을 때처럼 “남자들이 힘없는 여성을 가두지 않았느냐”며 비판자 자체의 자격을 문제 삼아 ‘반사’하는 것이 음모론의 핵심이다. 이를 지은이는 ‘비판 면역 전략’이라 이름 붙였다. 비판에 당당하게 면역반응하는 것이다. 반대로 권력이 없는 사람들은 ‘이단 음모론’이라 낙인찍히고 정당한 물음이라고 해도 검증, 확정, 인정받을 역량이 없거나 적다.

음모론은 권력과 인정의 문제다. 공적인 영역에서 음모론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거대한 폭력에 노출되는 반면, 권력자는 음모론을 책임 회피와 특정인 배제의 수단으로 쓴다. 미국의 매카시즘, 한국의 빨갱이 낙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하지만 힘없는 자들도 음모론을 사용한다. 지배층을 비판할 때, 그리고 자기보다 더 약한 이들을 공격할 때다. “르상티망”(비밀스런 앙심, 강력한 혐오감)은 더 약한 자를 조준할 수 있다. 일본 재특회, 서구의 인종주의자, 한국의 일베는 전형적인 “순응적 반란자들”이라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반란이지만 권력자를 비판하지 않고 기존 질서에 복무한다. 소외당한 무력감, 서민이 체험하는 기대와 현실의 간극이라는 고통을 착취하는 정치집단이 있다는 것이다. “고통에 시달려 분노한 서민들이 자신들이 아니라 부자들을 위해 싸우는 것은 통치와 저항의 음모론이 절합(접합)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정보원 같은 국가기관의 선거 개입, 사실상 대운하 개발이었던 4대강 사업,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행해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와 박원순 후보 인터넷 누리집에 대한 디도스(분산서비스거부) 공격 등 ‘국가 범죄’이거나 이에 필적할 만한 사실들은 왜 밝혀진 뒤에도 힘을 받지 못하는가?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전 교수는 “감정적 에너지가 태워져버리고 휘발되는 까닭”이라고 답했다. 음모론은 정당한 비판의 힘까지 약화시켜버리는 효과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정적’이 돼야 할 사람들을 악마화해 필요한 문제제기까지 휘발시켜버리는 것이 음모론의 단점이다. 그래서 음모론의 시대는 위험하다. 전 교수는 “분명 권력을 쥔 사람에게 책임이 많지만, 모든 것을 권력자의 책임으로 모는 것도 무리가 있다”고 덧붙였다.

해결책은 베버가 제안한 ‘책임윤리’에서 나온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사태처럼 책임질 일은 생기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 국가 범죄처럼 민주주의를 파괴하지만 면책받는 ‘조직화된 무책임성’이 문제의 핵심이다. “고통 가운데 있는 시민들은 책임의 부담에 허덕이지만, 권력은 책임에서 자유롭다. 책임질 일은 자꾸 생기는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지은이는 음모론에 내재된 비판의 잠재력을 되살리려면 그에 찍힌 부당한 낙인부터 지워내야 한다고 밝힌다. “정치적 사안에 대한 루머와 음모론을 정신병자나 종북주의자와 같은 정형화된 음모집단의 조작과 선동으로 낙인찍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주의할 점은, 불신하지 않으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질문”을 하되, 그 질문에만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답변이고자 과욕을 부리면 그것은 더 이상 비판이 아니게 된다. 망상이 된다. 도그마가 된다.” 이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다면, 이미 그는 ‘책임윤리’를 지닌 사람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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