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밸런스시트 불황으로 본 세계경제
리처드 쿠 지음, 정성우·이창민 옮김
어문학사 펴냄(2014) 한국 경제가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는 진단이 늘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금리인하 등 비상한 대응을 요구하고 나섰다. 우리뿐 아니라 리먼브러더스 붕괴 이후 6년이 흐른 지금, 세계 경제가 일본화하고 있다고 경고하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반면교사일 텐데 실상 이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이른바 ‘아베노믹스’가 기대와 달리 실패 쪽으로 기우는 걸 보면 일본도 아직 정확한 진단과 해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리먼 사태 이후 영국 여왕 앞에서 경제학자들이 실토한 대로 ‘경제지식의 위기’이기도 하다. 노무라총합연구소 연구원인 리처드 쿠가 지은 <밸런스시트 불황으로 본 세계경제>는 ‘일본화’를 걱정하는 세계에 영감을 주는 책이다. 이는 쿠가 ‘잃어버린 20년’의 한복판에서 씨름해 온 연구자이기에 그럴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말대로 세계 어느 경제학 강의실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개념과 진단, 처방이 들어 있다. 핵심은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자산거품의 붕괴에 따른 불황은 일반적인 사이클상의 불황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번 경제위기가 일본과 닮은 것도 둘 다 거품붕괴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황이 닥치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공격적으로 낮춰 투자와 소비를 유도한다. 하지만 거품붕괴에 이은 불황에는 금리를 낮춰도 돈이 기업과 가계 등 민간으로 스며들어가지 않는다. 이번에 미국 연준이 금리를 0% 수준으로 낮추고 양적완화까지 동원해 3조달러 가까이 퍼부었지만, 돈은 금융권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중앙은행에 쌓인 준비금이 법정준비금의 20배나 된다. 일본도 과거 20년 동안 금융권의 유동성을 5배 늘렸지만 통화량은 84% 늘어나는 데 그쳤다. 현상유지 정도 외에 통화정책의 효용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거품이 꺼지며 대차대조표(밸런스시트)에 타격을 입은 민간이 빚을 갚는 데 몰두하기 때문이라고 리처드 쿠는 진단한다. 일본 6대 도시의 상업용지 가격은 최대 95%가 날아갔다. 주가지수도 꼭짓점 대비 60%가 줄었다. 이렇게 사라진 국부가 국내총생산(GDP) 3년치에 해당하는 1570조엔이었다. 빚을 내 부동산 등을 샀던 일본 기업들은 제로금리 상태에서도 10년 이상 매년 30조엔 넘게 빚을 갚는 데 몰두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타격을 입은 미국 민간부문도 금리가 제로인데도 지디피의 6% 선까지 저축을 하고 있다. 기업도 가계도 돈을 안 쓰는데 경기가 살아날 리가 없다. 쿠는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인데도 민간이 빚을 갚는 데 몰두하는 것은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1920년대 미국 대공황에서부터 확인된 이런 패턴을 ‘밸런스시트 불황’이라 정의한다. 우리에겐 30대 재벌 중 16개가 쓰러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가 그런 트라우마였다. 이후 기업들은 빚을 줄이고 유보금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 구원투수는 재정지출이다. 금융권에 쌓인 저축(미차저축)을 빌려서 소비해 줄 주체가 정부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정적자가 늘어나겠지만 이는 평상시에 방만한 운용으로 생긴 악성 적자와 달리 경기가 회복되면 사라지는 ‘좋은 재정적자’이다. 쿠는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제학자와 언론을 질타한다. 쿠는 밸런스시트 트라우마는 한 세대가 사라져야 비로소 잊혀진다고 말한다. 거대한 거품으로 망가진 경제가 몇년 만에 회복될 것이라는 조급증을 버리라는 말로 들린다.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bhlee@hani.co.kr
리처드 쿠 지음, 정성우·이창민 옮김
어문학사 펴냄(2014) 한국 경제가 일본을 닮아가고 있다는 진단이 늘었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디플레이션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금리인하 등 비상한 대응을 요구하고 나섰다. 우리뿐 아니라 리먼브러더스 붕괴 이후 6년이 흐른 지금, 세계 경제가 일본화하고 있다고 경고하는 책들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이 반면교사일 텐데 실상 이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다. 이른바 ‘아베노믹스’가 기대와 달리 실패 쪽으로 기우는 걸 보면 일본도 아직 정확한 진단과 해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리먼 사태 이후 영국 여왕 앞에서 경제학자들이 실토한 대로 ‘경제지식의 위기’이기도 하다. 노무라총합연구소 연구원인 리처드 쿠가 지은 <밸런스시트 불황으로 본 세계경제>는 ‘일본화’를 걱정하는 세계에 영감을 주는 책이다. 이는 쿠가 ‘잃어버린 20년’의 한복판에서 씨름해 온 연구자이기에 그럴 것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말대로 세계 어느 경제학 강의실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는 개념과 진단, 처방이 들어 있다. 핵심은 부동산이나 주식 같은 자산거품의 붕괴에 따른 불황은 일반적인 사이클상의 불황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번 경제위기가 일본과 닮은 것도 둘 다 거품붕괴에서 출발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황이 닥치면 중앙은행은 금리를 공격적으로 낮춰 투자와 소비를 유도한다. 하지만 거품붕괴에 이은 불황에는 금리를 낮춰도 돈이 기업과 가계 등 민간으로 스며들어가지 않는다. 이번에 미국 연준이 금리를 0% 수준으로 낮추고 양적완화까지 동원해 3조달러 가까이 퍼부었지만, 돈은 금융권에 머물고 있다. 그래서 중앙은행에 쌓인 준비금이 법정준비금의 20배나 된다. 일본도 과거 20년 동안 금융권의 유동성을 5배 늘렸지만 통화량은 84% 늘어나는 데 그쳤다. 현상유지 정도 외에 통화정책의 효용이 사라진 것이다. 이는 거품이 꺼지며 대차대조표(밸런스시트)에 타격을 입은 민간이 빚을 갚는 데 몰두하기 때문이라고 리처드 쿠는 진단한다. 일본 6대 도시의 상업용지 가격은 최대 95%가 날아갔다. 주가지수도 꼭짓점 대비 60%가 줄었다. 이렇게 사라진 국부가 국내총생산(GDP) 3년치에 해당하는 1570조엔이었다. 빚을 내 부동산 등을 샀던 일본 기업들은 제로금리 상태에서도 10년 이상 매년 30조엔 넘게 빚을 갚는 데 몰두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타격을 입은 미국 민간부문도 금리가 제로인데도 지디피의 6% 선까지 저축을 하고 있다. 기업도 가계도 돈을 안 쓰는데 경기가 살아날 리가 없다. 쿠는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인데도 민간이 빚을 갚는 데 몰두하는 것은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1920년대 미국 대공황에서부터 확인된 이런 패턴을 ‘밸런스시트 불황’이라 정의한다. 우리에겐 30대 재벌 중 16개가 쓰러진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가 그런 트라우마였다. 이후 기업들은 빚을 줄이고 유보금을 쌓기 시작했다. 이때 구원투수는 재정지출이다. 금융권에 쌓인 저축(미차저축)을 빌려서 소비해 줄 주체가 정부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정적자가 늘어나겠지만 이는 평상시에 방만한 운용으로 생긴 악성 적자와 달리 경기가 회복되면 사라지는 ‘좋은 재정적자’이다. 쿠는 둘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제학자와 언론을 질타한다. 쿠는 밸런스시트 트라우마는 한 세대가 사라져야 비로소 잊혀진다고 말한다. 거대한 거품으로 망가진 경제가 몇년 만에 회복될 것이라는 조급증을 버리라는 말로 들린다. 이봉현 편집국 미디어전략 부국장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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