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주의 경제학은 기존 경제학에서 배제한 ‘시장이 아닌 곳’, 보이지 않는 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진은 2012년 3월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노동을 상징하는 빨간 고무장갑을 끼고 행사에 참석한 전국비정규직여성노조 조합원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경제학’에 ‘여성주의’ 접목 시도
공사영역 분리·부불노동 비판
‘시장과 부엌’ 이원론 극복 주장
공사영역 분리·부불노동 비판
‘시장과 부엌’ 이원론 극복 주장
홍태희 지음/한울아카데미·2만9000원 1972년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 캠페인’을 펼친 페미니스트 학자 실비아 페데리치는 “그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부불노동(돈을 지불하지 않는 노동)이라고 말한다”고 밝힌 바 있다. ‘사랑’ ‘모성’이란 미명 아래 경제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여성 노동의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낸 것이다. 기존 경제학은 성중립적인 학문으로 여겨져왔고, 연구 영역은 시장에서의 경제활동에 국한됐다. 반면 여성주의 경제학은 시장이 아닌 곳, 보이지 않는 경제에 대해 눈길을 준다. <여성주의 경제학: 젠더와 대안 경제>는 기존 경제학에 여성주의와 젠더(성별)의 문제를 접목하는 연구를 10여년 동안 이어온 홍태희 조선대 경제학과 교수가 그간 발표한 논문을 바탕으로 썼다. 지은이는 기존 경제학이 왜 여성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는지 분석하고 기존 미시·거시 경제학, 경제발전론과 성장론의 한계를 넘어 대안적인 경제학으로 여성주의 경제학이 자리매김될 수 있는지 검토한다. 지은이는 여성주의를 “도덕과 정의에 관한 문제”로 보고 ‘성별관계’가 경제현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파고든다. 성별관계는 노사관계처럼 물질적 가치생산을 하는 공적인 생산관계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적 영역의 무급가사노동은 생산활동이 아니었기에 경제학 분석대상이 아니었다. 공적 영역에 진출한다고 해도 여성은 남성보다 기회가 적고 빈곤해질 가능성이 높다. 2014년 세계경제포럼의 ‘남녀격차 보고’는 일자리 양성평등이 83년 뒤에나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에서 여성 비정규직 비율은 2013년 현재 41%로, 남성 27%에 견줘 눈에 띄게 높다. 여성 임금은 세계적으로도 남성의 50~80%에 머물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지난 30년간 평균 4%에 불과했다. 독일 사회학자 마리아 미즈는 빙산모형으로 ‘가부장적 자본주의’ 경제를 설명한다. 국내총생산(GDP)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데, 인류생존에 불가피한 가사노동·봉사활동·돌봄노동·자가소비 등이 국내총생산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다. 국민소득계정 바깥의 ‘위성 국민소득계정’이 가진 부가가치는 한국의 경우, 2004년 국민총생산의 35.4%에 달한다. 여성주의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는 여성들이 주로 수행하는 돌봄 경제에 ‘착한 사람(이타주의)의 딜레마’가 작동한다고 보았다. 착한 사람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여성이 착하고 이타적이라는 주장을 거부하고, 돌봄노동에 대한 보상과 법적 조치를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존 경제학이 강조하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뿐만 아니라 시장 바깥에 은폐돼있는 ‘보이지 않는 가슴’을 경제문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얘기다. 페데리치도 가사노동을 사회적 영역으로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발달사를 분석하며 중세 마녀사냥은 자본주의 시초 축적의 수단이었고, 이후에도 재생산노동이 지속적인 자본 축적을 떠받쳐왔다고 분석한다. 자본주의는 남성 저임금 노동을 지탱하는 가정의 재생산노동을 은폐했고, 여성의 가사노동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환원하며 공사영역을 분리해왔다는 것이다. 저임금노동, 부불노동에 시달려 갈수록 가난해지는 ‘빈곤의 여성화’ 뒤에는 이를 용인하는 국가가 있었다. 따라서 지은이는 “여성들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밝힌다. 자본주의 국가는 ‘발전’이란 명목 아래 무급 재생산노동과 저임금 여성노동을 이용하려고 성별관계를 조정하는 정책을 시행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근대화를 추진한 1960년대 국가 주도의 경공업 발전전략에서 주역을 맡은 이들은 저임금 여성노동자들이었다. 1970년대 중공업 위주 경제발전전략으로 바뀌면서 숙련노동은 남성, 비숙련노동은 여성이라는 노동시장의 성별분할이 뚜렷해졌다.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었지만 1990년대 이후 저성장 속 여성들은 노동시장 진입에 어려움을 겪고, 경력단절에 시달린다고 지은이는 분석했다. 여성주의 대안경제의 핵심은 여성과 남성, 약자와 강자가 더불어 사는 삶이다. 이를 실현할 방법으로 지은이는 사회적 경제, 연대 경제, 공정 무역, 소액 대출, 사회적 기업 등을 소개한다. 돌봄서비스처럼 한 데 모여야 가치가 만들어지는 재화를 가리키는 ‘관계재’의 생산과 분배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여성 또한 자립하고 자조하는 경제가 바탕이 돼야 정의롭고 공평한 경제활동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학에서의 ‘시장과 부엌’이라는 이원론을 극복하자는 뜻이다. 이 책은 2015년 비로소 탄생한 한국 여성주의 경제학의 교과서라고 일컬을 만하다. 여성학에 경제학적 분석을 기계적으로 덧붙인 것이 아니라 여성 경제학자가 경직되고 벽이 높은 기존 경제학에 여성주의라는 시각으로 과감하게 정면도전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국내에선 계급, 인종, 성별, 나이, 국가 등 ‘제한의 구조’를 민주적이고 평등하게 관리하자는 연구가 적었다는 점도 이번 책이 돋보이는 이유다. 다만 ‘여성성’을 대안경제의 열쇠말로 사용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여성주의 경제학을 이타적이고 착한 ‘모성’ 경제학으로 환원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거듭 설명하다시피 여성주의 경제학자들은 돌봄노동,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이론적 정교화와 언어화에 몰두하며 공적영역의 편향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왔다. 이런 점을 강조한 책의 고갱이를 붙잡고 추가 논의가 활발해진다면 한국 여성주의 경제학의 지평을 한뼘 더 넓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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