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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간 인터뷰 마다않던 울리히 벡, 존경할 만”

등록 2015-01-06 15:42수정 2015-01-06 16:28

8일 오후 울리히 벡 ‘위험사회’의 저자이며, 독일 뮌헨대 교수가 프레스센터에서 해방적 파국, 기후변화와 위험사회에 던지는 함의’ 강연에 앞서 참가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8일 오후 울리히 벡 ‘위험사회’의 저자이며, 독일 뮌헨대 교수가 프레스센터에서 해방적 파국, 기후변화와 위험사회에 던지는 함의’ 강연에 앞서 참가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작고한 울리히 벡에 대한 기자의 짧은 기억
“소박하고 열정적이되 겸손, ‘석학’다운 면모 갖춰”
“항상 낮은 자세로 학문·삶에서 근대성 성찰한 지성인”
지난 4일 밤, ‘위험사회’를 이야기해온 울리히 벡 독일 뮌헨대학교 교수가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황망했다. 1일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숨진 그의 죽음은 사흘 뒤에서야 그가 계약한 출판사를 통해 알려졌다고 했다.

2011년은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서 재난이 터진 해다. 그해 가을, 이와 관련한 기사를 준비하면서 울리히 벡 교수에게 무작정 이메일을 보냈다. 별 기대 없이 ‘한번 찔러나 보자’ 하는 마음이 앞섰는데, 몇 시간 만에 답장이 왔다. “좋습니다, 인터뷰 날짜를 잡아봅시다”

국외 취재 전에 인터뷰를 섭외하기란 안절부절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는 것과 비슷하다. 그때도 한 달 전부터 약속을 잡아가기 시작했건만, 재깍 오는 답장은 없었고, 겨우 연락이 닿아도 일정은 어그러지기 일쑤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촌음을 다퉈 사는 유명 인사들이 한국에서 온 낯선 신문사 기자에게 시간을 내주는 건 생산적인 활동은 아닐 터. 당시 독일과 영국에서 네 사람의 인터뷰를 추진했는데, 울리히 벡 교수가 가장 먼저 인터뷰를 수락하는 답장을 보냈다. ( ▶ 당시 인터뷰 기사 링크 : 울리히 벡 “정부·기업의 투명한 정보공개, 위험사회 관리의 지혜” )

울리히 벡
울리히 벡
그의 연구실은 대학 본부에서 떨어진, 약간은 후미진 거리의 한켠에 있었다. 벡 교수는 바게트 빵을 파는 동네 아저씨처럼 남색 더플코트를 입고 나타났다. 인터뷰가 시작되고서도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시계를 쳐다보며 ‘한 시간밖에 안 돼’ 하는 자세를 보였지만, 벡 교수는 끝을 보겠다는 자세로 달려들었다. 인터뷰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해 준 것도 그였다. 일흔 살 가까이 된 그는 그때에도 장시간의 말하기가 힘들어 보였다. 숨을 가빠하면서도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기며 근대성과 과학기술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난 가을까지 영국에서 동물과 인간관계에 대해 공부하면서 나는 울리히 벡이 남긴 학문적 성취의 그림자 안에 있었다. 근대 밖에서 사유하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과 달리 그는 근대의 내부에 머물면서 근대성에 대해 비판과 성찰을 시도한 비판이론가를 계승하고 있었다. 원자력발전소, 인수 공통 전염병, 유전자 조작식품 그리고 첨단무기로 무장한 전쟁 등 과학기술의 무한한 질주를 경계하면서도, 반성하고 성찰하는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찰적 근대화)를 믿었다.

내가 연구하는 주제, ‘인간이 동물을 지배하는 방식’도 어찌 보면 근대성의 극단이었다. 이를테면 공장식 축산업은 아우슈비츠의 수용소를 연상시켰으며, 도구적 이성으로 사용된 과학기술의 또 다른 발명품이었다. 울리히 벡은 바로 그러한 근대적 극단에서 ‘위험’이 발생하고, 세계적 미디어에 의해 그런 ‘위험’이 유통되며, 그린피스와 반전단체 등 초국적 엔지오들이 저항하는 가운데 국가가 정책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영국은 ‘변종 크로이츠펠트-야콥병’으로 100여명이 숨지는 극단의 터널을 통과했다. 그리고 지난해 우리는 세월호의 침몰에서 위험이 내재한 허술한 근대문명을 목도했다. 울리히 벡은 한국 사회에도 관심이 많아 한상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와의 공동 작업도 여럿 했다. ‘압축 근대’의 전형인 한국 사회는 그에게 당연히 흥미로운 주제였을 것이다. 인터뷰가 끝났는데도 자꾸 한국 이야기를 하던 그가 기억이 떠오르지 않아 책과 논문을 찾던 모습이 떠오른다.

8일 오후 울리히 벡 ‘위험사회’의 저자이며, 독일 뮌헨대 교수가 프레스센터에서 해방적 파국, 기후변화와 위험사회에 던지는 함의’ 강연에 앞서 참가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8일 오후 울리히 벡 ‘위험사회’의 저자이며, 독일 뮌헨대 교수가 프레스센터에서 해방적 파국, 기후변화와 위험사회에 던지는 함의’ 강연에 앞서 참가자들과 인사를 하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울리히 벡은 지식인으로서도 사회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독일이 만든 사회적 협의기구인 ‘안전한 에너지 공급을 위한 윤리위원회’에 참가해 원전 폐쇄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일조했다. 원전 폐쇄야말로 그의 이론에서 부르는 ‘성찰적 근대화’였을 것이다. 그는 정치공학이나 통치기술을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말은 깊은 뿌리의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사회공학적인 해결책보다는 큰 그림을 그리면서 부분과 전체를 아우르려 했다(그는 아내인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과 ‘사랑’을 연구한 책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1990)도 썼다. 그는 정녕 삶과 학문을 분리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소박하고 열정적이되 겸손했던 사람. 살면서 존경하고 싶은 생각이 든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때 ‘석학’이나 ‘대가’는 입이나 머리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제 누가 우리의 근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학문에서나 삶에서나 낮은 자세로 우리와 우리 자신을 이루고 있는 근대성을 성찰하던 그의 모습이 그립다.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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