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낸 김사인 시인. “장미만 득세하고 분꽃, 채송화, 맨드라미는 장이 서지않는 것이 우리 시단의 현실”이라며 “상처 입고 피 흘리는 삶을 노래하는 서정시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김사인 시인 9년 만에 세번째 시집
김태정, 여운, 통영, 삼천포…
동양적 세계관과 현실 비판 함께해
김태정, 여운, 통영, 삼천포…
동양적 세계관과 현실 비판 함께해
김사인 지음/창비·8000원 김사인의 세번째 시집 <어린 당나귀 곁에서>는 한국 서정시가 도달한 한 고갯마루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시집 첫머리에 실린 시 <달팽이>의 구절처럼 “한없이 느린 배밀이로/ 오래오래(…)/(…)/ 더듬더듬/ 먼 길을” 간 끝에 이른 지점이어서 더욱 귀하고 반갑다. 두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과 이번 시집은 햇수로 9년 차이가 난다. 첫 시집 <밤에 쓰는 편지>에서 두번째 시집까지는 무려 19년 세월이 걸렸더랬다. ‘김사인 달팽이’의 속력이 두배 남짓 향상됐달까. 그렇다고 해서 신호를 위반하거나 새치기를 하는 식의 편법을 쓴 것은 아니다. “마감 날은 닥쳤고 이런 것도 글이 되나”(<에이 시브럴>)라는 회의와 의심의 말이 없지 않지만, 그런 회의와 의심조차 겸양을 가장한 오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편편이 꼼꼼하고, 허투루 부려 쓴 말이 없다. “울 밑의 봄동이나 겨울 갓들에게도 이제 그만 자라라고 전해주세요./ 기둥이며 서까래들도 그렇게 너무 뻣뻣하게 서 있지 않아도 돼요, 좀 구부정하세요./ 쪽마루도 그래요, 잠시 내려놓고 쉬세요.”(<김태정> 앞부분) “나지막한 언덕 강아지풀”처럼 낮게 엎드려 살다 간 시인 김태정을 노래한 시는 생전의 그를 기억하는 이에게는 망자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듯한 착각을 준다. 글쓴이가 후배 시인의 태도와 심성을 적확히 꿰뚫어 본 결과다. ‘인사동 밤안개’라는 낭만적인 별명을 거느렸던 화가 여운에 대한 시도 마찬가지다. “바바리는 걸치고서/ 인걸들 하나둘 저물어가는/ 인사동 고샅을/ 밤마다 순찰 돌았네/ 그래도 혹시나 하고/ 수몰 앞둔 시골 면소/ 충직한 총무계장처럼.”(<인사동 밤안개-여운 화백> 부분)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가 동료 문인들의 특성과 장점을 익살스런 문장에 담아 쓴 인물평이 유명하거니와, 운문 쪽에서 그에 맞먹을 만한 사례가 김사인의 인물 시들이 아닐까 싶다. “어진 막내처제가 있어/ 형부! 하고 쫓아나올 것 같은 명정골 따뜻한 골목입니다./ 동백도 벚꽃도 이젠 지엽고/ 몸 안쪽 어디선가 씨릉씨릉/ 여치가 하나 자꾸만 우는 저녁 바다입니다.”(<통영> 마지막 연) “담배 문 손등으로 비가 시린데 말이지,// 갯가로 시집간 딸아이 웅크린 등에도 이 찬비 떨어지겠고 말이지,// 쉐타 팔짱 너머, 널어놓은 가재미 도다리나 멀거니 내다보겠지,”(<삼천포 1> 앞부분) 사람마다 외양과 성격상 특징이 있다면 지역에도 나름의 표정과 정서가 있을 것이다. 시집에는 소도시 규모의 지역을 다룬 시도 몇편 들어 있는데, 그 시들이 묘사하는 풍경과 자아내는 분위기가 사실주의 풍경화인 양 여실하다. “아직 산 놈이면 봐주는 게 어떻겠는가, 하자/ 한사코 죽은 놈이라 우긴다”(<사바>)는, 어린 귀뚜라미를 끌고 가는 늙은 개미와의 대화라든가, “때가 되자/ 그는 가만히 곡기를 끊었다./ 물만 조금씩 마시며 속을 비웠다./ 깊은 묵상에 들었다”로 시작해 “개의 몸으로 그는 세상을 다녀갔다”로 마무리한, 개의 죽음을 노래한 시 <좌탈>, 또는 “날이 저무는 일/ 비 오시는 일/ 바람 부는 일/ 갈잎 지고 새움 돋듯/ 누군가 가고 또 누군가 오는 일/ 때때로 그 곁에 골똘히 지켜섰기도 하는 일// ‘다 공부지요’ 말하고 나면 좀 견딜 만해집니다.”라는 시 <공부>에서 보듯 ‘김사인표 서정’의 바탕에는 불교적이랄까 동양적인 세계관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손쉬운 달관과 화해로 나아가지는 않는 것이 또한 김사인 서정시의 듬직함이다. 시집 제3부에는 현실과 정치를 다룬 시들이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불길한 저녁>이라는 빼어난 ‘정치시’는 2015년 1월 현재 시점에서 더할 나위 없이 적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고등계 형사 같은 어둠이 내리네./ 남산 지하실 같은 어둠이 내리네./(…)// 유서대필 같은 비가 내리네./ 죽음의 굿판을 걷자고 바람이 불자/ 공안부 검사 같은 자정이 오네./ 최후진술 같은 안개 깔리고/(…)//(…)/ 집요한 회유같이 졸음은 오고”(<불길한 저녁> 부분)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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