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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50여년 뇌 기억 미로를 탐색하다

등록 2015-01-08 21:17수정 2015-01-09 10:21

뇌 수술로 기억을 상실한 채 장기간 실험 대상이 됐던 헨리 구스타브 몰레이슨(1926~2008). 그는 뇌과학 분야에 새 지평을 열어준 영웅인가, 아니면 한낱 비극적 희생자인가? (사진 왼쪽부터) 어릴 적 헨리와 수술 전 청년 헨리, 그리고 노년의 헨리. 알마 제공
뇌 수술로 기억을 상실한 채 장기간 실험 대상이 됐던 헨리 구스타브 몰레이슨(1926~2008). 그는 뇌과학 분야에 새 지평을 열어준 영웅인가, 아니면 한낱 비극적 희생자인가? (사진 왼쪽부터) 어릴 적 헨리와 수술 전 청년 헨리, 그리고 노년의 헨리. 알마 제공
27살 때 뇌 내측두엽 절제
30초밖에 기억 못한 헨리
그는 영웅인가 희생자인가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
수잰 코킨 지음, 이민아 옮김/알마·19800원

‘작은 우주’ ‘최후의 개척 분야’로도 불리는 뇌에 관한 연구성과들이 최근 몇년 새 부쩍 늘고 있다. 미국 오바마 정부가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로서 ‘뇌 계획’을, 유럽연합이 ‘인간 뇌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으니 지구촌의 뇌과학 연구는 전례 없이 활발하다. 뇌를 들여다보는 뇌영상 기술의 발전, 그리고 지각·감정·인지·기억 등에 관한 기존 연구성과도 그 배경으로 한몫했을 것이다. 요즘엔 유전학과 광학을 이용해 빛으로 신경세포를 조작해 기억을 생성하거나 변형하는 실험도 이뤄지니, 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도약도 머잖은 듯하다.

뇌과학 발전의 이면엔 숱한 에피소드가 있을 것이다. 수잰 코킨 미국 매사추세츠공대 교수가 쓴 <어제가 없는 남자, HM의 기억>은 노장 뇌과학자인 저자가 지난 46년 동안 기억과 학습의 뇌 기능을 연구하며 함께해 온 기이한 기억상실증 환자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기억상실증 환자 ‘에이치엠’(HM)은 이미 뇌과학 분야에서 연구사례로 널리 알려진 이였는데, 2008년 그가 숨지자 그를 추념하며 지은 이 책에서 실명을 공개했다. “헨리 구스타브 몰레이슨을 기리며(1926.2.26~2008.12.2).”

헨리는 어린 시절에 시작된 간질 발작이 점점 심해지자 스물일곱살이던 1953년 ‘실험적인 뇌 절제 수술’을 받았다. 해마와 편도체를 포함한 양쪽 내측두엽 절제술을 받고 나서 그는 뜻밖에 30초 넘게 기억을 유지하지 못하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었다. 지능지수도 평균보다 높았고 십자말풀이도 즐기며 일상생활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여든두살 노인으로 숨질 때까지 그의 ‘과거’는 수술 전인 1953년 이전의 기억으로 동결되어 버렸다. 그의 뇌는 기억과 학습을 연구하는 많은 과학자한테 연구 대상이 되었다. 특히 저자인 코킨과 헨리는 1962년 첫 만남 이래 평생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코킨은 헨리가 남긴 여러 기록을 전한다. 헨리는 2008년 숨질 때까지 세계 과학자 120여명의 인지실험에 피실험자로 참여했으며, 1970년대 이후에는 뇌과학 교과서에 필수로 등장하는 연구사례가 되었다. 숨진 뒤 그의 뇌는 과학 연구에 기증돼 3차원 디지털 영상으로 이제는 연구용 웹(thebrainobservatory.org)에서 볼 수 있다. 그를 기억하는 영화, 연극, 방송도 만들어졌다. 헨리가 남긴 인상적인 말을 책에서 읽을 수 있다. 어느 날 헨리는 피실험자로 참여하는 따분한 일이 어떠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참 재밌죠. 사람은 살면서 배우거든요. 그런데 나는 살기만 하고, 배우는 건 선생 몫이죠.”

헨리의 개인적 비극은 역설적이게도 인류에 뇌과학의 많은 발견을 선사했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각기 다른 뇌회로에서 일어나는 별개의 기억이라는 사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서술기억은 사라져도 몸이 익힌 운동기술의 기억은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 서술기억을 유지하지 못해 과거의 사실은 기억하지 못해도 감정을 통해서 기억의 흔적이 남을 수 있다는 사실 등은 헨리의 뇌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미래 상상도 과거 경험의 일화기억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것도 밝혀졌다. 헨리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할 뿐 아니라 미래도 상상할 수 없기에, ‘현재 시제’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뇌를 들여다보는 연구기법이 보잘것없던 초창기에, 헨리의 뇌는 기억과 학습 연구의 표준모델처럼 여겨졌다. 코킨한테 헨리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책에 담긴 갖가지 일화가 보여주듯이, 헨리는 그저 관찰 대상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연구자였고 한 사람은 피실험자였지만, 두 사람은 뇌와 기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찾는 긴 여정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동반자요 협력자였다”. 저자는 책 말미에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헨리 구스타브 몰레이슨의 삶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헨리는 의학 실험에 자기 인간성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을 잃어버린 한낱 비극적 희생자인가, 아니면 뇌에 대한 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영웅인가?”

헨리의 이야기는 장기기억 없는 삶이란 무엇일까, 기억은 얼마나 복잡하고 놀라운 현상인가, 과거와 미래는 기억에서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묻고 생각하게 하는 기억상실증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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