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악 전집
곽효환·이경수·이현승 편
소명출판·5만9000원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 철길 우에/ 느릿느릿 밤 새어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는 길에 한번쯤 마주쳤을 법하다. ‘광화문 글판’의 겨울 문구로 뽑혀 교보생명 건물 전면에 그 일부가 걸려 있으니 말이다. 한 시절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였던 인사동 술집 ‘평화만들기’ 내벽에는 20여년 전 김지하가 한달음에 외워 쓴 세로글씨 버전이 술맛을 돋우었더랬다. 벽째 뜯겨 유랑하던 이 글씨가 지난해 봄 미술품 경매에 나왔다는 소식이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이라면 민중가수 이지상이 곡을 붙여 부른 노래로 기억할 수도 있겠다. 이용악(1914~1971)의 시 <그리움> 얘기다.
이용악은 서정주·오장환과 더불어 1930년대 시단의 ‘3재(才)’로 꼽히던 시인이다. 두만강과 접한 함경북도 경성 출신인 그는 일본 유학 중이던 1937년과 1938년 도쿄에서 첫 시집 <분수령>과 두번째 시집 <낡은 집>을 펴내면서 일약 문단의 기린아로 떠올랐다. 일제 말기에는 붓을 꺾고 고향에 칩거하던 그는 해방 직후 서울로 와서 조선문학가동맹 서울지부 선전부장으로 활동했으며 1947년에는 오장환의 권유로 남로당에 가입했다. 1949년 8월 좌익 예술단체 활동 때문에 붙잡힌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전쟁통에 인민군 손에 석방되어 북으로 올라갔다.
1957년 조선인민군 창건 5주년 기념 문학예술상 운문 부문 1등상 수상소감이 실린 <문학신문>. 소명출판 제공
다른 많은 납·월북 문인들과 함께 남쪽 사회에서는 금기로 묶여 있던 이용악은 1988년 해금과 함께 <이용악시전집>(윤영천 편)이 간행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백석(1912~1996)과 함께 한국 시의 북방정서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날로 밤으로/ 왕거미 줄치기에 분주한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이 집에 살았다는 백성들은/ 대대손손에 물려줄/ 은동곳도 산호관자도 갖지 못했니라// 재를 넘어 무곡을 다니던 당나귀/ 항구로 가는 콩실이에 늙은 둥글소/ 모두 없어진 지 오랜/ 외양간엔 아직 초라한 내음새 그윽하다만/ 털보네 간 곳은 아모도 모른다”(<낡은 집> 앞 두 연)
“알룩조개에 입 맞추며 자랐나/ 눈이 바다처럼 푸를 뿐더러 까무스레한 네 얼굴/ 가시내야/ 나는 발을 얼구며/ 무쇠다리를 건너 온 함경도 사내// (…) // 차알싹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취한 듯/ 때로 싸늘한 웃음이 소리 없이 새기는 보조개/ 가시내야/ 울 듯 울 듯 울지 않는 전라도 가시내야/ 두어 마디 너의 사투리로 때 아닌 봄을 불러 줄게/ 손때 수집은 분홍 댕기 휘 휘 날리며/ 잠깐 너의 나라로 돌아가거라”(<전라도 가시내> 부분)
1959년 <문학신문>에 실린 시 <우산벌에서>. 소명출판 제공
일제강점기 이용악의 시는 식민 수탈에 못 이겨 고향을 떠난 유민(流民)의 슬픈 현실을 인상 깊게 포착했다. <낡은 집>에서 거미줄과 외양간 냄새만 남긴 채 밤도망을 놓은 털보네 일가족, <전라도 가시내>에서 북간도 술막에서 이루어진 함경도 사내와 전라도 처자의 조우는 정처 없이 떠도는 식민지 백성의 애환을 눈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 보인다.
그러나 비슷한 배경을 지닌 백석이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누리는 데 비해 이용악에 대한 관심은 시들해진 느낌이 없지 않았다. <이용악시전집>이 절판된데다, 백석과 달리 북쪽에서 쓴 작품들이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탓도 있었다. 이참에 이용악 연구자 세 사람이 힘을 모아 <이용악 전집>을 새로 내놓은 배경이다. 이경수 중앙대 국문과 교수와 이현승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그리고 곽효환 대산문화재단 상무가 편자로 참여한 <이용악 전집>은 1947년판 <오랑캐꽃>과 1949년 검거 직전에 낸 <이용악집>까지 월북 이전 시집 네권에다 1957년 북에서 출간한 <리용악 시선집> 수록작과 시집에 실리지 않은 시들은 물론 유일한 산문집인 <보람찬 청춘>(1955)과 수상 소감, 좌담 등 산문까지 망라해 명실상부한 ‘전집’으로 구실하도록 했다.
곽효환 상무는 새 전집이 2000년대 이후 활기를 잃어 가는 이용악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특히 북한에서 발표한 작품들을 처음 소개함으로써 그에 대한 후속 연구, 예를 들면 남로당계 숙청 과정에서 살아남아 북의 문단에 연착륙한 과정과 관련한 작품들에 대한 연구, 북한 문예이론의 변동에 따른 이용악의 시적 변화, 북에서 낸 유일한 산문집 <보람찬 청춘>에 대한 후속 연구 등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일반 독자들에게도 분단과 전쟁이 한 시인의 작품 세계와 생애를 어떻게 변화·굴절시켰는지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리 조국의 지도 우에/ 새로이 그려 넣을/ 푸른 호수와 줄기찬 강들이/ 얼마나 많은 땅을 풍요케 하는가/ 얼마나 아름다운 생활을 펼치는가// 평화를 열망하는 인민들 편에/ 시간이여 네가 섰음을 자랑하라”(<격류하라 사회주의에로> 앞부분)
“전진은 멎지 않는다/ 혁명은 쉬지 않는다/ 미제의 마수에 시달리는 남녘땅/ 기한에 떠는 형제들에게 자유와/ 참된 생활을 줄 그날을 위하여// 새해의 첫아침/ 붉은 태양이/ 우리의 정열처럼 솟아오른다/ 우리의 염원처럼 솟아오른다”(<우리의 정열처럼 우리의 염원처럼> 뒷부분)
이용악의 월북 전 시집 <분수령> <오랑캐꽃> <이용악집>(왼쪽부터) 표지들. 소명출판 제공
각각 1956년작과 1959년작인 이 두 작품은 북에서 쓴 이용악 시의 기조를 잘 보여준다. 시대 현실과 역사의 흐름을 날카롭게 포착했던 한 뛰어난 시적 재능이 이토록 뻔한 ‘선전시’로 주저앉은 것을 보며 실망을 느끼는 독자들이 적잖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들을 쓰기 전, 1953년 8월 임화·이원조 등 남로당계 문인들이 숙청될 때 이용악 역시 6개월 이상 집필 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실망은 이내 안타까움으로 바뀌지 않을까. 그에게는 자신의 문학 세계를 지키는 일 이전에 목숨을 건사하는 일이 시급했음이었다.
“나는 죄인처럼 수그리고/ 나는 코끼리처럼 말이 없다/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너의 언덕을 달리는 찻간에/ 조그마한 자랑도 자유도 없이 앉았다// (…) // 길이 마음의 눈을 덮어줄/ 검은 날개는 없느냐/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북간도로 간다는 강원도치와 마조 앉은/ 나는 울 줄을 몰라 외롭다”(<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 1연과 마지막 연)
1930년대 작품인 이 시 역시 유랑의 길에 오른 식민지 백성의 처지를 쓰라리게 노래해 아프다. 1958년 양강도로 현지 파견을 나갔던 이용악은 1960년대에는 조선 후기 민간의 노래인 풍요와 악부시를 정리하고 번역하는 일에 매달렸다. 백석이 러시아문학 번역으로 말년의 경력을 채웠던 것과 비교할 만하다. 1968년 9월 공화국 창건 20주년 훈장을 받은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은 푸에블로호 사건을 소재로 삼은 시 <날강도 미제가 무릎을 꿇었다>(1969. 2)였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