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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산동네의 추억, 아픔 삭인 너스레

등록 2005-09-29 19:21수정 2005-09-30 16:57

권혁웅 시집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 시집 <마징가 계보학>
70년대 성북 삼선동 성장기록 행상 어머니…‘피박’ 쓴 아버지 이웃집 독수리 오형제, 드라큘라 골목마다 비극은 난무했지만 멀리보이는 불빛들은 아름다웠네
권혁웅(38)씨의 두 번째 시집 <마징가 계보학>(창비)은 가령 유하 시인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나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같은 시집을 떠오르게 한다. 표제시말고도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 <애마부인 약사> <독수리 오형제> <원더우먼과 악당들> 같은 제목의 시들은 대중문화의 코드를 통해 한 시대(=시인 자신의 성장기)를 설명하고자 했던 선배 시인 유하씨의 작업에 곧바로 이어져 있는 듯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물론 권혁웅씨의 작업은 유하씨의 그것과 다르다. 스스로 감독한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도 알 수 있듯 유하씨의 성장기가 70년대 후반이었던 데 비해 그보다 너댓 살 아래인 권씨의 성장기는 80년대 초에 해당한다. 시간의 차이에 공간의 차이가 더해져서, 유하씨에게 압구정동과 세운상가가 있었다면 권씨에게는 서울 성북구 삼선동 어름의 산동네가 있다. 시집 <마징가 계보학>은 시인 권씨가 성장기를 보낸 70년대 후반 서울 산동네에 바치는 송가이자 애가라 할 법하다.

“동소문동에서 창신동까지/30킬로그램 화장품 가방을 양손에 하나씩 들고/그 여자, 씩씩하게 걸어서 오네/장땡이라도 꽃밭에 뜬 보름달 앞에선 무용지물,/사슴의 무리는 지아비의 손아귀에서 울고/전세 보증금은 삼팔광땡 앞에서 울어/사면이 도무지 초가였어도/그 여자, 쉬지도 않고 걸어서 오네/양손에 쌀 백 근을 나누어 들고/내 깔깔한 혓바닥에 벼이삭 심으러 오네”(<떨어져나가 앉은 산 위에서>)

성장기를 회고하는 시들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우선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시집에서 그려진 바에 따르면 어머니는 화장품 행상이었고 아버지 역시 책과 건강용품 따위를 파는 행상이었지만 행상에 못지않게 아버지가 몰두했던 것은 ‘직장 동료’들과 함께 집에서 즐겼던 고스톱이었다(<고스톱에 관한 보고서>). 인용된 시에서 보듯 어머니가 억척같은 생활력과 헌신적인 자식 건사로 특징지어지는 반면, 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주로 도박 및 술주정과 결부되어 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

“어느날, 새우눈을 가진 직원이 판을 엎었다(…)/말리던 아버지만 소주병에 맞았다/아버지 혼자 피박과 광박을 다 덮어썼다/병을 깬 직원은 청단처럼 서슬이 파랬고/병에 맞은 아버진 홍단처럼 얼굴이 붉었다/마당의 닭들이 고도리처럼 날아올랐다”(<고스톱에 관한 보고서>)

대중문화 코드로 시대를 말하다


고스톱 전문용어와 유혈낭자한 상태를 한꺼번에 표현한(=일타 쌍피한?!) ‘피박’을 비롯해 청단·홍단과 고도리의 비유 등에서 보듯 권혁웅씨의 시는 중의법과 반의법, 위트와 패러독스에 능하다. 그런 언어적 특징으로 해서 시집은 가난하고 답답했던 시절을 회고하는데도 불구하고 시종 밝고 명랑한 어조를 잃지 않는다. 가령 어릴적 집에서 차례로 기르던 두 마리 개에 관한 시 <돈 워리 비 해피>에서 장염에 걸려 비실대던 워리를 결국 잡아먹었다는 사실은 “아버지는 약값과 고기 값을 한번에 벌었습니다”라는 함축적인 문장으로 표현된다. 넓은 마당의 슈퍼를 낮과 밤으로 나누어 지키던 부자(父子) 주인을 두고 “낮에는 백발에 기역자로 굽은 허리를 하고 있다가 밤이 되면 새까만 머리에 꼿꼿한 허리로 일어섰”(<슈퍼맨>)노라고 묘사할 때, 그리고 늙은 주인이 세상을 뜬 지 25년 뒤에 다시 찾은 슈퍼에 “늙은 주인이 돌아와 있”더라며 “그 먼 곳에서 25년을 건너 어떻게 돌아왔을까?” 너스레를 떠는 데에서 자재로이 말을 부리는 권혁웅씨의 재능은 빛을 발한다.

<투명인간 2>라는 작품은 <슈퍼맨>과 유사한 발상을 보인다. “할머니 천식이 또 시작되었다 지겨워”라고 시작되었던 시는 할머니가 실은 14년 전에 이미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서술되면서 아연 긴장을 띠게 된다. 그렇다면 이 천식 소리의 정체는?

“할머니는 어디서나 있었다/수도꼭지에서 쇳물을 쿨럭이며 뱉거나/비 듣는 시멘트 기왓장 아래 누워/낙숫물을 흘려대기도 했다”

수도꼭지의 쿨럭이는 쇳물 소리, 시멘트 기왓장을 흘러내리는 낙숫물 소리, 또는 하수구를 꾸르륵거리며 빠져나가는 물소리가 할머니의 천식 소리로 바뀌어 들렸다는 것인데, 이 시의 백미는 정작 맨 뒤의 두 줄에 있다.

“내가 어머니, 하고 부를 때마다/할머니가 돌아보신다”

투명인간이 된 할머니,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세월이 흘러 이제 그 자신이 할머니가 된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과 포개지는 과정은 절묘하면서도 따뜻하다.

권혁웅씨의 시들에서 영화나 만화영화, 대중음악과 같은 대중문화의 기호들은 산동네의 이웃들을 호명하는 약호로서 동원된다. 가령 <독수리 오형제>는 “우리 집보다 해발 30미터가 더 높은 곳에 살았”던 정복이네 4남 1녀를 가리키며, <괴수대백과사전>에 오른 ‘용가리’ ‘불가사리’ ‘고지라’ 따위는 사실 아이들의 눈에나 무섭고 굉장해 보이는, 평범한 이웃 주민들을 이른다. ‘용 용(龍)’ 자를 돌림으로 삼은 형제들 이야기인 <드래곤>, 관 짜는 집을 등장시킨 <드라큘라>, 산동네 이웃에 살면서 어린 연애를 했던 장인천과 오수원의 미완의 러브스토리 <수인선 이야기>, 심지어는 집 천장을 뛰어다니다가 결국 연탄집게에 맞아 죽은 쥐의 일생을 증언한 <미키마우스와 함께> 역시 같은 맥락에 놓인다.

김소진 ‘장석조네…’의 시적버전

권혁웅씨의 산동네 시편들은 유하씨와 동갑이었던 요절 작가 김소진의 연작소설 <장석조네 사람들>의 시적 버전이라 할 법도 하다. 산동네에서 보낸 성장기는 물론 어렵고 신산스러운 것이었지만, 그 나름의 행복과 재미 또한 없었다고는 하기 어려울 테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인생의 이치가 그곳에도 고스란히 적용되겠기 때문이다. <산등성이 마을의 불빛들>이라는 시는 그 점을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멀리서 보면 그 마을의 불빛들은/저들끼리 일가를 이루어/바람에 깜박이곤 했습니다/별자리가 별을 낳듯/조그만 길들이 가등(街燈)을 낳고 담벼락을 낳고/시멘트 기와지붕을 낳았습니다/그 빛더미 어디선가 나 역시/4등성처럼 희미하게 빛났을 것입니다/(…)/돌아봐도 그곳은 여전히 캄캄하고/불빛들만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그러다 참다못한 별 하나,/가출하면서 성냥을 긋듯/슥, 타오르기도 했습니다만”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사진 이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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