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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위대한 주권자들인가 변덕스럽고 폭력적인 군중인가

등록 2015-04-02 19:45

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서약>(1791)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적 장면을 묘사하며 인민·대중의 이중적 상황을 성공적으로 재현했다. 그린비 제공
자크 루이 다비드 <테니스 코트의 서약>(1791)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상징적 장면을 묘사하며 인민·대중의 이중적 상황을 성공적으로 재현했다. 그린비 제공
‘SHL’ 거대 인문학 프로젝트
근대적 현상으로서 ‘대중’
18~21세기 집단성 총체 복원
대중들
제프리 슈나프·매슈 튜스 엮음, 양진비 옮김
그린비·4만5000원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묘사한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에는 두가지 뜻이 숨어 있다. 집단의 정치적 열정이 왕정에 맞서 민주주의 주권을 창출하는 역사적 순간, 그리고 또 하나는 혁명이 끝나고 난 뒤엔 비가시적인 ‘숫자’로 전락하는 인민의 현실이다.

근대적 현상으로서 ‘대중’은 귀스타브 르 봉, 지그문트 프로이트, 한나 아렌트 같은 학자들을 지적으로 자극했고 자크 루이 다비드, 외젠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미술가들과 빅토르 위고, 귀스타브 플로베르 등 작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1000여쪽짜리로 출간된 <대중들>은 지난 2000년 창립한 스탠퍼드 인문학 연구소(SHL)가 5년 동안 막대한 자금과 시간을 투입한 뒤 선보인 학제간 협동연구의 결정체다. 개별 학문의 한계를 넘어 ‘대중’의 사회문화적 특성과 역사성을 밝힌 전무후무한 연구 실험인 동시에 ‘거대 인문학 프로젝트’가 무엇을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는지를 과시한 것이기도 하다.

총 50여명의 연구자들이 쓴 16개의 표준 길이 에세이와 32개의 짧은 부록은 18세기 위대한 혁명들부터 21세기까지 부상하고 몰락한 ‘대중’에 대한 문화·사회적 분석을 총망라한다. 표준 길이의 에세이로 대중에 대한 역사적 계보를 그리거나 회화, 영화, 문학, 스포츠, 시장 등 각 분야를 검토하며 이 개념이 변화하는 맥락을 조망한 것이다.

미국의 독립혁명(1776~83), 프랑스 대혁명(1789), 독일의 3월 혁명(1848), 러시아의 2월 혁명(1917) 등 근대사의 결정적 사건을 만든 주체는 대중이었고 이에 대한 충격과 놀라움은 분석적 연구로 이어졌다. <군중심리학>(1895)을 쓴 프랑스 부르주아 출신 귀스타브 르 봉(1841~1931)은 이 분야를 개척한 학자로서 자신의 대표작과 함께 이 책에서 50번 이상 등장한다. 그는 근대가 “군중의 시대”임을 알리며 “군중의 힘은 그 무엇으로부터도 위협받지 않고 그 위세가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유일한 힘”이라고 주장했다.

19세기 프랑스의 ‘대중의 발명’을 설명하는 스테판 욘손 교수(스웨덴 린셰핑대학·민족학)는 주권이 인민에게 전달되던 순간, 인민은 산수의 원칙에 따라 측정되는 추상적 단위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대중의 힘으로 대의적 민주주의 체제가 도입된 뒤 빈곤과 무지로 정치적 결정에 참여할 수 없는 인민은 그저 ‘다수’로 전락해버리기 때문이다. 인구통계학의 창시자 아돌프 케틀레는 인구학적·생물학적 데이터의 평균을 낸 ‘평균인’, 곧 ‘정상적인’ 인간을 발견했고, 이는 ‘포함과 배제’라는 정치적 메커니즘으로 이어졌다. 평균인은 대중적 의지의 대표자로 특정 계급과 정당에 이용되지만, 나머지는 배경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그림은 대중에 대한 이런 이중적인 뜻을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

고대 그리스·라틴학 전문가 조이 코널리 뉴욕대 교수는 ‘군중 정치’에서 영화 <벤허>를 시작으로 20세기 미국 영화들이 왜 그렇게 로마 군중에 매혹되는지 분석한다. 미국과 영국 일부에서는 로마를 제국의 모델로 생각하며, 공화주의적 이상주의로 환기시킨다. 1세기 키케로의 연설부터 현대 영화까지 지도자에게 고분고분한 군중 통제의 수사적 기법은 ‘통제가능한 자유’라는 상류층의 환상을 달성시키는 데 기여해왔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러나 대중이 지닌 불완전성과 미완결성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정치의 본질과 연관돼 있기에 “군중은 역사의 중심이며, 공화국의 건설과 그 몰락의 조짐 모두에서 역할을 수행한다.”

16편의 표준 길이 에세이들 말미에는 학자, 사회활동가들의 개인적 ‘증언’ 형태의 짧은 에세이와 집단성에 관한 핵심 어휘의 변화를 추적하는 미시사 부록을 붙였다. 독일 비판철학과 프랑크푸르트 학파 전문가인 수전 벅-모스 코넬대 교수는 부록 에세이 ‘밀집과 느슨함’에서 발터 베냐민의 “밀집된” 대중과 혁명 계급의 “느슨한” 군중형태를 비교한다. 자신의 경험과 이론을 종합하면 “반동적인 군중과 혁신적인 군중의 차이는 육체적으로 식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진 반전시위 부대, 2004년 봄 워싱턴에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며 행진한 수백만명 여성들은 “느슨한 군중”이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주관적인 이라크 침공”에 항의하는 2003년 2월15일 세계 시위는 “새로운 세기에 정치적 연대의 거대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조”가 되었다. 반면 이 혁신적 군중 반대편의 “밀집된 대중”의 사례는 검정색 갑옷을 입은 “경찰 기동대”다. 그들은 내부의 공황을 감추려고 마스크를 쓰고 “기껏해야 자위의 본능에 의해 동기가 유발된 폭력으로 반응할 준비를 한다.”

근대적 대중의 역사적 의미를 총체적으로 분석한 이 한권의 책은 ‘혁명적 조류: 1914~89년의 정치 포스터의 예술’이라는 미국 내 전시(2005~2006)로도 이어졌다. 제1차 세계대전부터 베를린 장벽 붕괴까지 대중적 주권을 표현한 이 기획전은 100여개 정치포스터와 조각품을 선보였다. 대중 인터넷 누리집에는 이 작품들과 대중 세미나 자료를 모두 담았고 이론가들의 사상을 그래픽으로 정리했다.

‘연구의 종말’까지 거론되는 인문학의 위기 속에 자잘한 프로젝트만 수없이 양산하고 있는 우리 학계에 이런 장기 거대 기획의 실현은 뜻깊은 참조가 될 듯하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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