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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리스는 억울하다

등록 2015-04-09 20:55

이봉현의 책갈피 경제
달러의 역설
정필모 지음/21세기북스 펴냄(2015)

미국과 중국이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제) 한국 배치와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출범을 놓고 벌이는 신경전을 보며 두 나라의 패권 다툼이 가열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양대 초강국 사이에 낀 한국 외교의 처지가 곤궁하다.

한 나라가 패권국가가 되는 데는 정치력, 군사력 못지않게 경제적 역량이 있어야 한다. 미국이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으로 상징되는 브레턴우즈 체제를 출범시켰듯이, 국제 통화금융질서를 주도할 수 있을 때 명실상부한 패권국가가 된다. 자국 통화가 기축통화로 세계 어디서나 사용되는 패권국가는 앉아서 얻는 화폐 주조차익(시뇨리지)만 해도 쏠쏠한데다 외환·재정정책에서도 특권을 누리게 된다. 그래서 중국, 유럽연합, 러시아도 통화 패권의 한 축을 잡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통화를 매개로 한 국제경제 질서는 불가항력적인 경제적 결과를 빚어내기도 한다. 이럴 때 우리가 어느 나라를 두고 ‘게으르다’거나 ‘복지병에 걸렸다’는 등의 도덕적 단죄를 내리는 일이 참 경솔할 수 있다.

유럽의 ‘지진아’ 그리스와 ‘모범생’ 독일의 차이도 사실 단일통화 유로 창설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흔히 그리스는 분수에 넘은 복지를 누리다 재정이 거덜난 나라로 낙인찍혀, 복지 확대에 쐐기를 박는 사례로 국내 언론이 즐겨 인용했다. 반면 독일은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하르츠 개혁’ 으로 불리는 연금 및 노동유연성 개혁으로 ‘유럽의 병자’에서 모범생으로 복귀한 사례로 칭송받았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절반만 진실이다.

그리스 등 남유럽 국가의 불운은 2000년대초 독일에서도 굉음을 울린 정보기술(IT) 버블 붕괴에서 출발한다. 고점 대비 97%나 날아간 자산가치 폭락으로 개인과 기업은 빚더미에 올라앉고 독일 경제는 엉망진창이 된다. 독일 구제를 위해 유럽중앙은행(ECB)은 2%대의 금리를 2003년부터 2006년까지 유지하는 초저금리 정책을 썼다.

이런 초저금리 정책은 다른 유로권 국가에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그 결과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 버블 붕괴를 겪지 않은 나라에서는 경기 과열과 부동산 거품이 빚어졌다. 경기가 달아오르고 수입이 급증했다. 임금과 물가가 올라 경쟁력은 떨어졌고 경상수지 적자가 불어났다.

독일은 이들 나라에 수출이 늘어나면서 비로소 불황의 터널을 벗어나게 된다. 또 독일 기업과 가계가 빚을 갚는 데 여념이 없어 남아돌게 된 금융권 자금은 남유럽 국가의 정부가 발행한 유로화 표시 국채에 투자됐다. 이런 해외 자금 유입이 있기에 이들 정부는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복지 지출을 늘릴 수 있었다.

남유럽 국가가 유로를 쓰지 않았다면 경상적자가 늘어나면 통화가치를 절하하고 금리를 높여서 대응했어야 했다. 하지만 단일통화권에 들어간 뒤 금융정책 및 재정정책의 자율성이 제한돼 대응에 한계가 있었다. 결국 모든 영광은 독일에, 잘못은 그리스에 돌리는 평가는 가혹한 것이다.

이봉현 편집국 전략부국장
이봉현 편집국 전략부국장
통화를 매개로 한 국제경제 질서를 이해하기는 경제학 전공자도 버겁다. 그래서 최근 읽은 <달러의 역설>은 장점이 있는 책이다. 경제분야를 오래 다뤄온 언론인이 쓴 책답게 브레턴우즈 체제의 탄생에서부터 최근 양적완화 종료까지 달러 등 통화를 중심으로 세계경제의 불안과 위기를 비교적 쉽게 서술했다. 불황에 찌든 나라들이 앞으로 벌일 통화전쟁을 염두에 두고 읽어봐도 좋을 듯하다.

이봉현 편집국 전략부국장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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