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평판을 위해 소외된 사람들을 보살피지만
대개의 경우 카메라 앞에 서는 연기에 불과하다. 사실
‘높으신 분’들은 작은 결례도 모욕으로 느끼는 일이 많다. <한겨레> 자료사진
사회는 저절로 굴러가지 않는다
‘공공의 노력’으로 실현된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
‘공공의 노력’으로 실현된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
김현경 지음/문학과지성사·1만6000원 정치인들은 연기의 고수다. 선거철만 되면 으레 장애인 봉사를 하고 노숙인들에게 밥을 나눠주며, 쪽방에 들어가 웃음을 연출한다. 시설 수용자나 생활보호 대상자는 ‘낮은’ 위치에서 온정의 손길을 감사히 받아야 한다. 낙인 찍힌 사람은 연기가 더 어렵다. 때로는 가면으로 오점을 숨기고 남의 인정을 받아야 하지만, 어떨 땐 자신의 단점을 웃음으로 승화할 줄도 알아야 한다. 아무렇지 않다는 증거를 보여야 비로소 ‘사람’의 자리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적절하게 처신해야 ‘조건부 성원권’이라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장소, 환대>는 신분 차별이 철폐된 근대 이후 사회의 ‘형식적 평등’과 구조 안에서의 ‘실질적인 불평등’이 어떻게 긴장을 유발하는지 논증한다. 지은이는 프롤로그에서 이미 세가지 키워드를 다룬 책 내용을 요약해두었다.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으로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다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내주는 행위이다.” 인류학자 김현경은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한국의 근대화와 해외유학 관행에 대한 박사 논문을 쓰고 돌아와 여러 대학에서 인류학을 가르쳤다. 지난해 피에르 부르디외의 <언어와 상징권력>을 번역하기도 했다. ‘사람, 장소, 환대’에 대한 분석은 ‘독립연구자’로서 그가 진행한 10년 연구의 산물이다. 이 개념은 신자유주의의 차별과 불평등을 분석하는 유용한 아이디어로서 책이 나오기 전부터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먼저, 이론적으로 지은이는 ‘사람’이 아닌 노예, 사형수, 군인 등의 예를 들어 ‘호모사케르’(조르조 아감벤)의 양상을 다양하게 제시한다. 성원권의 법적인 박탈을 얘기한 한나 아렌트를 넘어서 지은이는 의례가 철회되거나 관계에서 소외되는 ‘사회적 죽음’까지 나아간다. 사람다움이나 존엄은 태어나자마자 저절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무대에서 연극하듯 타인과의 수행 속에서 인정받으면서 형성되는 것이라며 어빙 고프먼과 주디스 버틀러를 소환한다. 지은이는 ‘사회’를 구조중심으로 보는 관점과 개인간 행위 중심으로 보는 관점으로 구분해서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아와 세계라는 이분법 아래서는 돌파구가 없다는 것이다. “구조와 상호작용 질서는 개념적으로 구별될 뿐, 현실에서는 결합되어 나타난다.” 책은 대중적 에세이로서도 문화적 상상력을 자극하며 ‘깨알 재미’를 선사한다. 예시된 박재동 화백의 인권애니메이션 <사람이 되어라>(2005)를 보면, 학교는 짐승을 사람으로 만드는 동물농장이다. 고릴라 원철이는 숲에서 홀로 교양을 쌓아 갑자기 사람의 얼굴을 하게 된다. 담임 교사는 칭찬은커녕 “누가 네 맘대로 사람이 되라고 했어?”라며 “대학 가서 사람 되자”는 급훈을 가리킨다. 독학은 필요 없다. 괜찮은 대학을 나와야만 사람대접을 받는 것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로저와 나>(1989)는 제너럴 모터스의 로저 스미스 회장을 찾아가는 우여곡절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3만3000명 노동자를 하루아침에 해고한 회장에게 “집에서 쫓겨나는 노동자를 생각해보았냐”고 묻자 그는 잘라 말한다. 그런 건 집주인에게나 물으라고. 제도가 문제지, 사람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예의 바르게 월세를 올려달라는 주인의 멱살을 잡을 순 없으며, 만약 그렇게 한다면 이는 세입자의 개인적인 문제가 된다. 그저 분노를 가라앉히고 ‘내면의 상처받은 아이’인 ‘나’를 돌봐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술수다. 지은이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을 “자본에게 무한한 자유를 주고, 노동에게 극도의 순응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정리한다. 배제하려는 집단을 공공연히 모욕하는 것, 배타적 민족주의 운동이나 파시즘에서 나타나는 이 공격은 오늘날 더욱 심각해졌지만 피해자는 가볍게 이를 넘기는 ‘센스’가 필요하다. 무시나 모욕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이르러 ‘굴욕’으로 바뀐 것이다. 모욕에는 가해자가 있지만, 굴욕은 가해자가 특정되지 않는다. ‘굴욕사진’에 분노하면 찌질한 사람이 된다. 모욕보다 더 우스꽝스럽기 때문에 안전해보이는 굴욕은 ‘진짜 모욕’을 모욕적으로 느낄 수 없도록 작동한다. ‘땅콩 리턴’ 사건에서 보듯, ‘높은 사람’에게는 작은 결례도 큰 모욕이다. 신분과 지위는 ‘장소’이자 ‘자리’다. 모욕이 폭력적인 건 아래로 굴종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별 잘못도 없이 야단 맞은 아랫 사람은 분루를 삼키며 고개를 조아릴 수밖에 없다. “결국 모욕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는 폭력이다.” 이것이 반복되면 배제된 집단의 모욕은 권리 박탈로 이어진다. 아래의 삶이 피로한 건, 나날이 스스로 인간다움을 인정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고 미소를 주고받는 상호작용 의례는 언제나 “중단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여성, 외국인 노동자, 장애인, 비정규직들처럼 차별 당하는 집단은 이 사실을 인정해야 ‘사회’ 속에 머물 수 있는 자격을 조건부로 얻는다. 따라서 지은이는 사회의 재분배를 강력하게 암시한다. 모두가 부정하지만 사실상 ‘신분주의’가 부활하고 있으며, 더욱 심화되리라는 예견은 어렵지 않다. 결국 신분차별은 “장소/자리를 둘러싼 투쟁”이 된다. “한국 사회가 신분제로 회귀하고 있다는 증거는 많다. (…) 모든 기준에서 구별되는 특수한 계층들이 생겨나 사회 안에 별개의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데, 신분이란 이를 말하는 것이다.” 국경을 넘는 난민의 이동, 포클레인 앞에 드러누운 농민 시위, 노동자들의 점거는 “장소에 대한 투쟁”이며 “존재에 대해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이다. 문제해결의 방법은 ‘환대’에서 찾을 수 있다. 환대는 낯선 이에게 따뜻한 자리와 음식을 내주는 것으로, “타자를 도덕적 공동체로 초대하는 행위”다. 자크 데리다가 제시한 ‘절대적 환대’는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바라지 않으며, 적대적 타자에게도 복수하지 않는 환대를 가리킨다. 데리다는 정작 이런 환대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지은이는 이를 적극적으로 사회의 ‘공공성’과 연결시킨다. 주거수당, 실업수당 같은 복지는 사회 안으로 약자들의 자리를 마련하는 환대의 다양한 형식이라는 것이다. 사회는 ‘시스템’을 통해 저절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노력’으로 실현된다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우리를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대접이다.” 사회를 만드는 것은 “규범이나 제도”라기보다 “절대적 환대”라는 것이다. 다음 책으로 그는 채무·증여·복지에 대한 책을 인류학적으로 쓸 예정이라고 한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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